(글이 조금 깁니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나누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깨달음의 민족 - 한민족의 역사와 정신


들어가기 전에

서론 - 한민족 역사의 시작, 시대의 구분


Ⅰ. 한국 시대

1. 1대 안파견 한인


2. 천산 문명과 한국의 강역

3. 체제

4. 수밀이국(수메르)

5. 역대기


Ⅱ. 배달국 시대

1. 1대 거발한 한웅과 배달국 건국

1) 배달국의 건국
2) 천손과 지손

2. 배달국의 발전

1) 교화의 방법
2) 통치 구조
3) 경제 정책
4) 교육
5) 강역

3. 문자의 발명

1) 최초의 문자, 녹도문
2) 녹도문, 갑골문, 한자의 관계

4. 치우천황

1) 14대 자오지 한웅(치우천황)
2) 탁록의 함락
3) 치우천황과 황제헌원

5. 중국의 기원과 형성과정


6. 18대 거불단 한웅과 웅녀

1) 거불단 한웅
2) 웅녀의 깨달음

7. 신시역대기


Ⅲ. 단군조선 시대

1. 단군조선의 건국

2. 단군조선의 건국이념

3. 체제

4. 가림토 문자

1) 가림토 문자의 창제
2) 가림토 문자와 훈민정음
3) 훈민정음과 세계의 문자

5. 단군조선 사회

1) 단군조선의 이념
2) 단군조선의 교육

6. 단군조선의 강역

7. 중국과 일본의 기원과 형성과정

1) 중국의 기원
< 태호복희씨 >
< 황제 헌원과 요, 순 >
<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 >
< 춘추시대 >
< 연나라 >
2) 일본의 기원

8. 단군조선의 멸망

9. 단군조선 역대기


Ⅳ. 열국시대, 사국시대, 삼국쟁패시대, 남북국시대, 고려시대

1. 열국시대

1) 열국으로 분열
2) 위만조선의 실제
3) 열국의 사회문화
4) 열국의 대외관계
5) 한사군의 정체

2. 사국시대

1) 고구려
2) 백제
3) 신라
4) 가야
5) 불교의 발전

3. 삼국쟁패시대

1) 고구려의 발전
< 고구려는 북방의 강국이었다 >
< 여수 전쟁 >
< 여당 전쟁 >
2) 신라의 삼국통일
< 나당 연합군 결성 >
< 백제의 멸망 >
< 고구려의 멸망 >
3) 일본의 독립
< 왜국에서의 백제복국 운동 >
< 일본의 탄생 >
< 역사 만들기 작업 >

4. 남북국 시대

1) 대진국
2) 남북국시대의 신라
< 왕권 강화 >
< 당의 영향 >
< 귀족사회의 타락 >
3) 후삼국 시대
< 후백제 >
< 후고구려 >
< 신라 >
4) 고려의 탄생과 신라의 멸망
< 고려의 탄생과정 >
< 왕건의 유화정책 >
< 고려의 통일 >


5. 고려 시대

1) 과거 제도의 수입과 왕권 강화
2) 묘청의 고려 재건국 운동
< 시대적 배경 >
< 칭제건원과 북벌론 >
< 묘청의 북벌 운동 >
3) 고려말의 상황
< 무신의 난 >
< 몽고족의 침입 >
< 원나라의 간접지배 >
4) 고려의 멸망
< 고려말의 주변 정세 >
< 친원파와 친명파 >
< 정몽주의 죽음과 고려의 멸망 >



Ⅴ. 조선시대, 일제 시대

1. 조선 시대

1) 조선의 정신-유교(성리학)
2) 임진왜란
< 일본의 통일 >
< 임진왜란 >
3) 병자호란
4) 동학
< 시대적인 상황 >
< 동학의 창시배경 >
< 수운 최제우 선생 >
< 동학의 전개과정 >

2. 일제 시대

1) 세계의 정세
< 제국주의 시대 >
< 제국주의 국가의 거래 >
2) 대한제국과 만민공동회
3)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침략 과정
< 강제 개항 >
<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
< 청일전쟁과 을미사변 >
< 러일전쟁에서 한일합방까지 >
< 비극의 한일합방 >
4) 일본의 한국 지배
< 무단통치(1910년부터 1919년 3.1 만세 운동까지 >
< 2단계 문화정치 - 황민화 정책(1919년부터 해방까지) >
< 3단계 - 파쇼통치 >
< 조선 민족정신 말살정책 >
< 3.1 운동과 애국선열들 >


Ⅵ. 현대

1. 현대

1) 감격의 8.15 광복-분단의 시작
2) 일제 잔재 청산의 실패
3) 동족상잔의 비극 - 6.25 전쟁
< 전개 >
< 6.25의 결과 >
4) 변혁의 시대
< 이승만 대통령과 제 1 공화국 >
< 박정희 대통령과 제 3 공화국 >

민족이 중요한 이유

맺으며





깨달음의 민족 - 한민족의 역사와 정신



들어가기 전에

이글은 부족하나마 우리 한민족의 숨겨진 역사와 정신을 처음 접하시는 분들을 위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또한 다른 분들께서 정리하신 자료를 토대로 편집하였음을 밝힙니다.

이글의 내용은 처음 접하시는 분들이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만큼 우리 한민족은 훌륭하고 위대한 민족인 것입니다. 우리 국민 대분분이 알고 있는 "우리 민족은 보잘것 없고 못난 민족"이라는 것과는 너무나 크게 차이가 납니다. 아무쪼록 열린 마음으로 읽어 주시고 민족의 참역사와 정신을 알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일제의 민족정신 말살정책으로 인하여 우리 민족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는 거의 대부분 소실되었고 규원사화, 한단고기 등이 기적적으로 보전되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숨겨진 역사를 친일 민족반역세력들이 장악한 국내 사학계에서는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우리의 역사를 친일 민족반역세력과 동조세력들이 인정하지 않고 반발하거나 무시할 것이라는 것을 미리 밝혀 둡니다.

그리고 중국도 세계의 패권을 손에 쥐기 위하여 우리 민족의 역사를 왜곡하는 동북공정을 하고 있습니다.
(동북공정: 중국이 자국의 국경 안에서 일어난 모든 역사를 중국 역사로 편입하려는 연구)



서론 - 한민족 역사의 시작, 시대의 구분


우리 민족의 역사는 약 일만년 전 전 인류 최초로 깨달음을 얻은 안파견 한인이 건국한 한국으로 시작하여 배달국, 단군조선으로 이어졌다.
한국(7대 한인 3301년), 배달국(18대 한웅 1565년), 단군조선(47대 단군 2096년)의 시대를 한단시대라 한다.
한국의 건국은 기원전 7197년, 배달국은 기원전 3898년, 단군조선은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되었다.

한국은 3301년 동안 7대의 한인이 다스렸는데 1대의 평균기간이 약 471년이 된다. 그래서 한국이 7명의 한인이 다스린 것이 아니고 7대 왕조가 다스린 것이라고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약 1만년 전인 당시 사람들 혹은 깨달은 사람들의 수명이 지금보다 무척 길었던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한단시대의 특징은 인간내면의 깨달음을 중심으로 하는 깨달음의 역사였다. 한단시대에는 우리의 민족정신이 생겨났고 성장, 발전되었다. 그 기간동안 우리 민족은 주변 민족들에게 큰 문화적 혜택을 나누어 주며 홍익인간 이화세계라는 큰 정신으로 평화롭고 풍요롭게 살았다. 홍익인간 이화세계는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고 이치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반면 단군조선의 멸망이후의 시대는 인간내면의 깨달음이 끊어진 욕망과 약육강식의 역사라 한다.

이후의 역사를 간단하게 나열하면 단군조선 멸망이후 열국시대, 사국시대, 삼국쟁패시대, 남북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일제시대, 지금의 현대로 구분할 수 있다.
 
단군조선이 멸망한후 수 많은 나라로 나뉘어 졌는데 이를 열국시대라 한다. 그때의 나라는 부여, 가야, 낙랑, 남3한(남마한, 남변한, 남진한), 행인국, 비류국, 선비국, 개마국, 주나국 등 수 많은 나라로 나누어졌다.

사국시대의 나라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이며.
삼국쟁패시대의 나라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야는 신라에 병합됨)이다.
남북국시대의 나라는 대진국(대조영이 세운 발해), 통일신라, 통일신라에서 갈라져 나온 후백제와 후고구려이다.
이후는 고려시대, 조선시대, 일제시대, 현대로 이어진다.



Ⅰ. 한국 시대


1. 1대 안파견 한인

한국을 건국한 안파견 한인은 인간들이 야만적으로 살고 있던 아득한 구석기 시절 본성을 깨달은 분이었다. "모든 만물이 근본은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은 분이다.

한인께서 사람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자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고 최초로 그 깨달음의 문화를 세상에 전해준 안파견 한인은 백성들의 추대로 청해성에 있는 적석산에서 등극하여 한국 시대를 열었다.(기원전 7197년)

그리고 한인 밑에서 공부했던 제자들이 내려와서 모두 촌장들이 되어 부락을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렸다. 그로부터 천산문명이 시작되었으며 훗날 한국 12연방으로 성장 발전했다.


2. 천산 문명과 한국의 강역

한국(하늘 나라라는 뜻)의 중심은 파내류산(파미르 고원)과 바이칼 호수 사이에 있었으며 천해 동쪽의 땅을 파내류국이라고도 불렀다. 종족은 9한족 64무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땅의 넓이는 남북이 5만리, 동서는 2만 여리나 되는 엄청난 나라 였다고 한다.

한국은 캄차카 반도에서부터 중동지역, 아메리카 대륙까지 유라시아에 걸친 광대한 영역을 차지한 연합국가였다.


3. 체제

한국의 사회체제를 보면 여러 왕자들에게 서자라는 관직을 주고 서자부를 구성하여 천제의 지위를 잇게 하면서 방대한 한국 연방 통치의 참모 역할을 하게 하였다고 한다. 또 5가 제도, 한국시대로부터 시작된 방식인 화백회의, 한국을 통치하는 율령인 5훈이 있었다.


4. 수밀이국(수메르)

12한국중에서 고대한국의 역사가 실제했음을 알려주는 좋은 증거중의 하나가 수밀이국(수메르)이다. 수메르는 기원전 5천년에 갑자기 개화하여 기원전 3천년까지 지속되었다가 멸망한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초고대 문명이다.

오늘날 서양문명의 기원이라고 인정받는 초고대 문명인 수메르가 바로 12한국중 하나인 수밀이국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우르국은 수메르의 수도에 해당했던 도시국가로 바로 성경상에도 등장하는 갈대아 우르 지방이라고 한다.

서구의 역사학자들 역시 수메르인들이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원주민이 아니라 동방에서 유입된 산악민족이었다고 밝혀냈다. 그 이동 시기 또한 우리의 한국시대에 해당하는 기원전 5천년 - 4천년이었다고 한다.


5. 역대기

재위 연수만도 3,301년에 이르는 한국시대 역대 한인은 다음과 같다.

1대-안파견 한인
2대-혁서 한인
3대-고시리 한인
4대-주우양 한인
5대-석제임 한인
6대-구을리 한인
7대-지위리 한인



Ⅱ. 배달국 시대


1. 1대 거발한 한웅과 배달국 건국

1) 배달국의 건국

한국시대 7대 지위리 한인의 가르침으로 깨달음을 얻은 거발한 한웅은 의식이 밝아진 후 3천명의 무리를 이끌고 홍익인간을 이룰 성지인 태백산정 신단수아래 천평에 도읍하여 배달국을 건국하였다. (기원전 3898년)

한웅천황께서 건국하실 때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 수명, 질병, 형벌, 선악 등 5사를 주관하고 사람들을 다스리고 교화하였다고 삼국유사는 전하는데 풍백, 우사, 운사는 한웅천황과 마찬가지로 깨달은 사람들이었다.


2) 천손과 지손

거발한 한웅께서 배달국을 건국하신 후 도읍지를 신시라 하였는데 신시의 주민들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영적이고 수준높은 문화 생활을 하였다. 깨달음을 얻어 하늘의 이치를 알았던 사람들은 스스로를 하늘의 후손이라하고 천손이라 일컬었다.

그리고 신시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에는 호족, 웅족, 말갈족, 묘족등 당시에 정신적, 물질적으로 원시상태에서 살고 있는 12부족들이 있었다. 욕망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그들을 우리 조상들은 지손이라 불렀다.

한웅께서는 짐승처럼 본능대로 살고 있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한국시대의 관습대로 지손들의 세계를 순행하면서 그들을 교화시켰다.


2. 배달국의 발전

1) 교화의 방법

천손들은 홍익하기 위해 널리 가르침을 펴는 사업, 즉 교화 사업을 계속했다. 그래서 한웅천황이 건국할 때부터 사람과 나라의 도리에 대해 백성들에게 교화를 베풀었다. 이러한 교화 사업은 한국시대로부터 계승되어 내려온 순행, 또는 순방 제도에 의해 이루어졌다.

한웅께서는 지손사회를 불쌍히 여기시고 일년에 한번씩 순행하셨다. 배달국의 영역과 12한국의 후손들이 사는 지역을 한바퀴씩 돌면서 인간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 하며 가르침을 베풀었고 문화를 알려주며 교화를 해주셨다.


2) 통치 구조

최고 지도자인 한웅천황 밑에 1비왕, 3사, 5사 및 366사, 5가로 한국시대와 마찬가지로 민주적 의사결정 방식인 화백체제로 운영되었다. 천황의 최고 참모제도이며 지혜로운 3인의 스승들인 3사는 풍백, 시정을 맡은 우사, 행형을 맡은 운사이다.

또 신지, 고시, 치우, 주인 등의 관직을 두어 여러 가지 문화 문명의 이기들을 개발하고 제도를 마련하여 당시의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주었다. 또 한국시대와 마찬가지로 행정각부에 해당하는 5가 제도가 있어 주곡, 생명, 형벌, 병, 선악 등을 담당하며 백성들을 다스렸고 그 밑에 366사 조직이 있었다.

5가는 우가, 마가, 구가, 도가, 양가로서 총리인 풍백 밑에서 지방 행정 조직을 맡기도 했다.


3) 경제 정책

배달국 시대에는 정전법이 기본이었는데 백성들에게 평등하게 토지를 나누어주고 수확을 9등분하여 8을 백성들이 소유하고 1을 세금으로 내게하는 제도였다.


4) 교육

마음을 닦는 수행을 하였으며 효(가족사랑), 충(나라사랑), 도(인류사랑)를 깨우치게 하는 전인적 교육을 하였다.


5) 강역

배달국에서 독립해 나간 신농씨의 나라와 경계가 정해진 것은 10대 갈고 한웅(일명 독로한 한웅천황)때의 일로 중국 산동성 태산 남쪽의 공상을 경계로 동쪽이 배달국에 속했다. 아낌없이 문화를 전달해 주었지만 영토의 확장등에는 관심이 없었던 배달국의 국경이, 14대 치우천황 때 황제 헌원 등의 반역의 무리들을 제압한 후 확장 변경 되었다.

그리하여 한반도, 만주, 몽고는 물론 회남, 산동성, 하북성, 하남성, 강소성, 안휘성, 북경, 낙양등의 지역이 치우천황 때 차지하게 된 강역이다.  또한 수메르가 있던 메소포타미아 지방과 티벳, 인더스지역, 아메리카지역까지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이었다.


3. 문자의 발명

원래 하늘과 땅 만물의 형사을 본떠서 만든 뜻글자가 한문이다. 곧 하늘과 땅 그 자체가 한문의 원조이며 그 다음 한문의 원조가 신시시대에 우리의 조상들이 만든 녹도문(혹은 갑골문자)이라는 상형문자이며 그후 여러 과정을 거쳐 세분화 되어 한문이 만들어 졌다.


1) 최초의 문자, 녹도문

한웅천황은 신지씨 혁덕에게 설형문자(쐐기형 문자)인 서계(사물표시 부호글자)를 만들게 하였다. 신지 혁덕은 대대로 명령을 전하는 직책을 맡고 권선징악의 임무를 전담하고 있었는데 이 시대까지는 말로만 처리했을 뿐 문자로 기록하여 남기는 방법은 아직 없었다.

어느 날 사냥을 나갔던 신지씨가 모래땅에 찍혀 있는 사슴 발자국을 보고 기록하는 법을 깨닫게 되었다. 그후 만들어진 것이 녹도문이며 이것을 태고 문자의 시작이라 한다. (한단고기 태백일사)


2) 녹도문, 갑골문, 한자의 관계

녹도문은 배달국 시대에 이어 단군조선 시대에도 가림토 문자와 함께 진서라는 이름으로 계속 쓰였다. 그 녹도문이 단군조선의 제후국이자 같은 동이족의 나라인 은나라에서도 쓰여졌는데, 수도였던 유적지-은허에서 발견된 문자가 갑골문이다. 갑골문이란 거북의 등껍질에 새겨진 문자라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자는 중국글이 아니라 동이족이 만든 우리 글이다.


4. 치우천황

1) 14대 자오지 한웅(치우천황)

자오지 천황을 일명 치우천황이라 한다. 신시 시대 치안과 국방을 담당한 치우씨의 후손으로 14대 한웅으로 선출되었다.

치우란 "우뢰와 비가 크게 와서 산과 강을 크게 바꾼다"는 뜻이다. 치우천황께서는 신시의 옛 위엄을 이어받아 백성과 더불어 새롭게 시작하여 널리 베풀고 번영을 이루었다. 천하가 모두 그를 두려워하며 우러러 받들었다. 후세에 치우천황은 귀신같은 용맹이 뛰어났으며, 구리로 된 투구와 쇠로 된 갑옷을 입고 능히 안개를 일으키며 온누리를 다스렸다고 전해진다.


2) 탁록의 함락

거발한 한웅께서 배달국을 건국한 이래 배달국의 영역과 영향력은 점점 더 커지면서 많은 제후국들이 생겨났으며 감히 대적할 자들이 없었다. 또 태호복희씨가 신시의 문화를 지나인들에게 전해준 이래 그 수가 점점 불어났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고 세력이 커지면서 욕심이 생겨나 점차 신시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제후국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또 수가 불어난 지나인들도 그 수를 믿고 점차 신시를 넘보게 되었다. 드디어 배달국 후기 14대 치우천황은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무도한 자들에게 신시의 가르침을 따르게 하겠다고 마음먹으셨고 대대적인 정벌에 나섰다.

안으로는 용감한 병사를 양성하였고 밖으로는 세상의 변화를 관찰하며 갈로산의 쇠를 캐내어 무기를 만들고 군대를 재편하였다. 그렇게 해서 처음 한해 동안은 연전연승으로 아홉개 제후의 땅을 다시 점령하였고 유망의 정권이 쇠약해지며 신시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아 백성들이 살기 어렵게 되자 군대를 보내어 유망을 정벌, 탁록을 점령하였다.


3) 치우천황과 황제헌원

자오지 한웅 당시 공손헌원이란 자가 있었는데 그는 신시의 주민인 소전의 후손으로 원래는 동이족이었다. 헌원은 수가 늘어나면서 신시의 가르침에 저항하기 시작한 토착 지나족 백성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그들의 욕심을 부추겼다. 그는 스스로 황제라 부르며 치우천황을 공격하여 싸움을 걸었다.

치우천황은 장수 소호를 보내어 탁록을 공격하도록 하고 탁록을 포위하여 헌원의 군사를 멸하였다. 그래도 헌원은 굴복치 않고 10년에 걸쳐 73회나 끊임없이 공격해 왔으나 끝내는 저항할 힘조차 없게 되었다.

이후 치우천황께서는 정예병을 나누어 보내 서쪽은 예탁의 땅을 지키게 하고 동쪽은 회대의 땅을 취하여 성읍을 삼게 하여 헌원이 동쪽으로 도발해 올 수 있는 길을 지키게 하였다. 황제헌원은 이로써 홀연히 사라지게 되고, 헌원에게로 갔던 유망도 역시 세력을 잃어버렸다. 이렇게 하여 치우천황은 한반도, 만주, 몽고는 물론 회남, 산동성, 하북성, 하남성, 강소성, 안휘성, 북경, 낙양 등지를 평정하여 천하는 안정을 얻게 되었다.

(또한 중국 사서에 치우천황이 탁록에서 패하여 죽었다고 나와있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치우천황의 부하장수 한명이 탁록에서 패하여 죽었는데 치우천황의 부하장수 수십명이 치우천황과 똑같은 뿔투구와 갑옷을 하고 있었기에 당시에 그 장수를 치우천황으로 알고 사서에 적었던 것이다.)


5. 중국의 기원과 형성과정

한국시대와 배달국 초기까지도 지금의 중국이라 불리는 나라는 아예 없었다. 한국에 이어 배달국 역시 활발한 교화사업을 대륙에서 펼치고 있을 때 변두리 화산지역에 야만적인 무리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변두리에서 살고 있다 하여 지나족(China의 원음)이라 불렀으며 서토족, 하화족이라고도 했다. 중국이라는 호칭은 단군조선의 폐관이후 세력이 커지면서 스스로 붙인 이름이다. 반면 구한족, 구이족, 동이족은 우리 민족을 나타내는 이름이다.

5대 태우의 한웅 때 태호복희씨(기원전 3528-3413)가 원시적 생활을 하고 있던 지나족들에게 신시의 문화를 가르쳐 주었다. 동생인 염제 신농씨(기원전 3218-3078)가 그 뒤를 이어 그 지역을 다스렸는데, 신시에서 건너간 태호복희씨-염제신농씨-황제헌원을 훗날 지나인들은 삼황이라 불렀다.

이렇게 배달국의 신시에서는 변경의 야만적인 지역으로 높은 정신세계를 가진 사람들(왕자나 관리들)을 파견했으며, 그들의 가르침에 의해 그 지역이 다스려졌다. 배달국 말기에는 그 동안 파견된 관리의 자손들중에서 반역하는 무리들이 나오게 되었는데, 그 시발점은 황제라 자칭하며 배달국 14대 치우천황(기원전 2707-2598)에게 도전했던 공손헌원이었다.

이 황제헌원(기원전 2692-2592)이 오늘날 중국인의 조상으로 받들여지는 인물이다. 황제헌원으로 부터 전욱-제곡-요임금-순임금-우임금을 오제라 불렀다. 역시 동이족 출신인 요임금(기원전 2357-2258), 순임금(기원전 2233-2183)이 다스리던  요순시대는 우리나라로 치면 단군조선 초기에 해당한다. 그 뒤를 우가 왕이 되어 다스렸으며 하나라 왕조를 열었고 그후 은나라-주나라로 이어진다.


6. 18대 거불단 한웅과 웅녀

1) 거불단 한웅

거불단 한웅께서 3천명을 이끌고 신시를 만든 이래 신시의 주민들인 천손족이 있었고 신시 바깥에는 웅족, 호족, 말갈족, 묘족 등의 지손족들이 살고 있었다. 지손족이란 욕망이 이끄는 대로 사는 사람들을 말한다.

거불단 한웅께서는 일년에 한번씩 각 부락들을 한바퀴씩 순행, 인간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 하며 교화해 주시고, 여러가지 문화와 도구들을 알려주고 전해주며, 가르침을 베풀었다. 또 신시에서 지손족들에게 지도자를 내려보내면 그들이 각 부락의 정신적 지도자가 되어 지손족들을 다스렸다.

2) 웅녀의 깨달음

웅녀와 호녀는 곰과 호랑이를 각각 부락의 상징으로 삼는 웅족과 호족의 공주였는데, 어느날 지손들을 위한 순행길에 나서신 거불단 한웅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한웅의 모습을 보고 그 고귀한 모습에 반해서 자기들도 천손이 되어 신시에서 살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을 하게 되었다.

한웅께서는 비록 지손족일지라도 깨달으면 신시의 주민으로서 천손과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여기시고 두 공주에게 허락을 하셨다.

그런데 천손족 사회에 들어가 살려면 사람의 내면에 있는 수성(동물적 본성)을 없애기 위한 연단의 과정이 필요했다. 그래서 시험의 과정을 거치게 되었는데 햇빛도 비치지 않는 어둡고 습한 토굴속에서 쑥과 마늘만 먹으며 백일간 견뎌내는 공부였다. 그래서 수행을 시작했는데 호족의 공주 호녀는 견디지 못하고 중간에 뛰쳐나갔으며 웅녀는 끝까지 견디어 냈다.

그래서 사람이 되었는데 그것은 곰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원래도 사람이었지만 동물과 같은 의식수준에서 살아오다가 정신이 깨우쳐져서 마침내 참사람이 되었다는 말이다.

한웅천황과 백일간의 지극한 정성과 정화의 과정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른 웅녀 사이에서 나신 분이 국조 단군왕검이다.


7. 신시역대기

차례        칭호                                         재위년수
--------------------------------------------------
 1대    거발한 한웅(배달 한웅)                         94년
 2대    거불리 한웅                                         86년
 3대    우야고 한웅                                         99년
 4대    모사라 한웅                                       107년
 5대    태우의 한웅                                         93년

 6대    다의발 한웅                                         98년
 7대    거련 한웅                                            81년
 8대    안부련 한웅                                         73년
 9대    양운 한웅                                            96년
10대    갈고 한웅(독로한 한웅)                        100년

11대    거야발 한웅                                         92년
12대    주무신 한웅                                        105년
13대    사와라 한웅                                         67년
14대    자오지 한웅(치우천황)                         109년
15대    치액특 한웅                                         89년

16대    축다리 한웅                                         56년
17대    혁다세 한웅                                         72년
18대    거불단 한웅(단웅)                                 48년



Ⅲ. 단군조선 시대


1. 단군조선의 건국

단군왕검은 천손족인 한웅천황과 웅족의 공주이며 깨달음을 얻어 천손이 되신 웅녀사이에서 태어나신 분이다. 단군왕검은 기원전 2333년 10월 3일에 아사달에서 단군조선을 개국하였다.

단군왕검께서는 지극한 덕과 어진 마음을 갖춘 분이었다고 전해지며 하늘의 이치로 나라와 백성을 다스렸다. 백성들은 모두 마음으로부터 단군왕검을 따르며 하늘이 내려주신 분이라 여겼다.


2. 단군조선의 건국이념

단군조선의 건국이념은 신시 배달국의 이념을 이어받은 "홍익인간 이화세계" 이다. 한국, 배달국의 전통을 이어 이천년간 이어진 단군조선 시대의 사람들의 삶의 목적은 개인이 완성되어 홍익인간이 되고 전체의 완성을 위해 이화세계를 이루는 것이었다.
단군조선은 역대단군 47대, 2096년간 지속되었다.


3. 체제

단군은 정치적으로는 최고 통치자요, 정신적으로는 최고 지도자요, 교육적으로는 신하들과 백성들의 큰 스승이었다. 또한 최고 통치자인 단군의 제위계승과 같은 중대한 국사에 대한 의결기관으로는 3한 5가로 구성되는 화백회의(만장일치로 의사를 결정하는 최고회의)가 있었다.

삼한은 진한, 마한, 번한을 말하며 진한은 단군왕검께서 직접 다스리셨고 마한과 번한은 한(우두머리, 왕)이 다스리게 하였다. 마한의 왕을 마한, 번한의 왕을 번한이라 했고 그 밑에는 많은 제후들이 있었다.


4. 가림토 문자

1) 가림토 문자의 창제

단군조선 시대에는 선대인 배달국으로부터 계속 사용해 온 진서(녹도문자)가 있었다. 그러나 배움이 부족한 일반 백성들이 녹도문을 시용하기는 쉽지 않았다. 또 만물을 형상화한 뜻글자인 녹도문만으로는 완전한 문자체계가 이루어지지 않아 불편한 점이 많았다.

이렇게 해서 3대 가륵단군 경자 2년(기원전 2181년)에 단군조선의 문자인 가림토 문자가 탄생하게 된다.


2) 가림토 문자와 훈민정음

가림토 문자를 토대로 더 쉽게 4177년 뒤 재정비 된 것이 훈민정음이다. 이 가림토 문자는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한글의 원형으로 근세조선 세종 때는 훈민정음 28자로 재창제 되었으며 최근세에는 주시경 등에 의해 24자로 재정비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훈민정음 재창제의 증거

1)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받아 되었고 새 글자는 아니다. 언문은 전조선 시대에 있었던 것을 빌어다 쓴 것이다. [세종실록 103권(세종 23년에 발표한 글)]

2) 이 달에 상감께서 친히 스물여덟자를 지으시니 그 자는 고전을 모방한 것이다. [세종실록 25권(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첫 발표문)]

3) 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옵서 정음 스물여덟자를 창제하시고 간략하게 예의를 들어서 보이시면서 이름지어 가로되 훈민정음이라 하시니 상형하되 글자는 옛날의 전자를 본따고... [해례서문(정인지)-고려대 도서관 소장]

4) 언문은 모두 옛글자를 근본삼은 것으로 새로운 글자가 아니며 곧 자형은 비록 옛날의 전문을 모방했더라도 용음과 합자가 전혀 옛것과 반대되는 까닭에 실로 근거할 바가 없는 바입니다. (한글 재창재를 반대하는 최만리와 당대 유학자들의 집단 상소문중에서)


3) 훈민정음과 세계의 문자

한편 가림토 문자는 단군조선의 강역이었던 일본에 전해져 신대문자인 아히루문자가 되었다. 또 가림토 문자는 단군조선의 분국이었던 몽고로 건너가 "파스파" 란 고대문자가 되었으며 배달국의 분국이 있었으며 그 후예가 살고 있던 인도로 건너가 산스크리트 알파벳과 구자라트 문자의 원형이 되었다. 은나라의 갑골문에는 두종류가 있는데 그 중의 한가지가 바로 가림토 문자이다.

다시 말해서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기 수백년에서 몇천년 전에 일본, 중국, 인도, 몽고에 이미 가림토 한글이 전래되어 쓰여진 것이다.


5. 단군조선 사회

1) 단군조선의 이념

단군과 신하들의 관계는 스승과 제자들이었다. 또한 단군조선의 이념은 배달국으로부터 이어받은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정신인 것이다.

단군조선은 고도의 정신문화를 누렸으며 물질문명 분야와 경제적으로도 극도의 풍요를 누렸던 나라였다. 당시 주변 대부분의 종족들이 구석기, 신석기 시대의 원시인들로서 본능적인 욕망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단군조선만이 이렇게 고도의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민족의 비젼이자 건국이념인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정신에서 나오는 근원적인 힘 때문이었다. 동시에 다른 나라, 종족의 문화와 구별되는 그 비젼과 이념을 잃어버리게 되자 단군조선은 멸망하게 된다.(기원전 238년)


2) 단군조선의 교육

모든 백성이 홍익인간이 되기 위한 마음을 닦는 수행을 했으며 지덕체를 연마하는 사회교육이 이루어졌다.

14대 고불단제 때(기원전 1670년) 이미 국립대학이 설치되었다. 이로부터 단군조선의 수 많은 인재와 장수들이 배출되어 방대한 국가를 유지하는 데에 큰 기여를 하였다.


6. 단군조선의 강역

단군조선 건국 초기의 영토는 캄차카반도, 연해주를 비롯한 시베리아, 만주, 한반도와 제주도, 일본, 몽골, 티벳과 중국의 중동부(하북성, 하남성, 산동성, 안휘성, 강소성, 절강성, 산서성, 섬서성, 감숙성, 호북성, 호남성 등)까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곧 동북아시아 대륙을 대통일한 민족국가였다.


7. 중국과 일본의 기원과 형성과정

1) 중국의 기원

< 태호복희씨 >

배달국 5대 태우의 한웅천황의 막내아들이자 중국인들이 말하는 삼황오제의 시대를 연 태호복희씨가 변방(지나)으로 가서 천손의 정신문화를 전달해 준 데서부터 오늘날 중국민족의 역사가 시작된다. 당시는 변방의 야만족이라는 뜻의 지나족으로 불렸으며 후에 세력이 커지면서 가운데 중자를 붙여 중국이 되었고 나중에는 중화라 이름붙였다.

< 황제 헌원과 요, 순 >

복희씨 이래로 중국의 한족은 한웅천황 시대부터 신시에서 파견된 높은 차원의 정신을 가진 사람들(왕자나 관리들)에 의해 가르침을 받고 다스려졌다. 배달국 말기에는 파견된 관리들의 자손중에서 타락하여 반역하는 무리들이 나와 헌원의 전쟁도발과 같은 사건도 있었다.

중국의 첫 조상으로 일컫는 공손헌원은 배달국 시대 신시에서 파견된 관리인 소전의 자손으로 치우천황 때에 지나족을 부추켜 황제라 자칭하며 배달국에 도전했다. 그러나 반역의 무리들은 제압되어 질서가 바로 잡혔다.

이어지는 요순시대와 기원전 2천년 경의 하왕조, 기원전 1천 5백년 경의 은왕조, 기원전 1천년 경의 주왕조 시대는 단군조선 시대와 때를 같이한다.

<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 >

중국 역사상 가장 태평성대를 이룬 전설적인 요임금-순임금-우임금은 모두 동이족이었으며 하나라와 은나라도 동이족의 국가였다. 하나라는 단군조선의 가르침을 받는 제후국이었고 그 뒤를 이어 4백여년간 지속된 은도 동이족의 나라였다.("사기", 사마천) 은나라의 제후국에 불과하던 서쪽의 주족이 눈부시게 성장하여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기원전 1천년경 주나라를 세웠다.

주나라 또한 단군조선의 세력권 내에 있어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공물을 바쳐왔다. 단군조선의 제도를 본따서 친족들에게 영토를 나누어 주고는 군소 제후국들로 삼았고(봉건제도의 원형) 후에 그들이 반란을 일으켜 춘추전국시대가 되고 많은 국가로 나누어지게 된 것이다.

< 춘추시대 >

지나족들이 오늘날 중국이라 불리우는 중국다운 독자적인 문명을 이루기 시작한 것은 남쪽으로 도망갔던 화하족의 후예들이 은나라를 물리치고 주나라를 세운 다음의 일이다.

주왕조 초기(기원전 1100년경)에 1천여 개나 되었던 크고 작은 제후국들이 후에 주 황제의 말을 듣지않고 싸움을 벌였으며 이들이 통합되면서 이른바 춘추시대(기원전 770년)에 들어간다. 진, 한, 위, 조, 초, 연, 제, 진(앞의 진과는 한자가 다르다), 오, 월 등이 대표적인 나라이다. 후에 그 수가 줄어들면서 전국시대가 된다.

< 연나라 >

연나라는 은나라 멸망 이후 그 유민들과 흉노족들이 세운 나라라고 한다. 근원을 따라 올라가면 이렇듯 같은 동족이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환경과 문화의 이질감이 생겨났다. 드디어는 힘을 키우면서 전국시대에 주도권을 다투는 국가중의 하나가 되었다. 다른 나라들 보다 단군조선에 가까이 있어 단군조선 말기에 단군조선의 힘이 약해지자 변경을 호시탐탐 노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침범했다. 그러나 늘 단군조선에 의해 패퇴하였다.

단군조선이 문을 닫게 된 것은 대부분의 제국들이 그러하듯이 나라 안에서 내분이 생겨서 망한 것이다. 그때 주변에 있던 연나라, 제나라 등 단군조선에서 갈라져 나간 나라들은 영토, 문화, 국력면에서 단군조선과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진나라가 지나를 최초로 통일한 것도 기원전 221년의 일이다.


2) 일본의 기원

한단고기에 나오는 일본 지배층의 기원은 단군조선 시대로부터 시작된다.

단군조선 3대 가륵단제 10년(기원전 2173년) 두지주 예읍의 추장 소시모리가 반역해 여수기를 명하여 그를 참했다. 이때부터 그 땅을 소시모리라 하며 그 음이 바뀌어 소머리국이라 한다. 그 후손중에 협야노라는 자가 있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삼도(지금의 일본열도)에 웅거하며 스스로 천왕이라 참칭하였다.
 
35대 사벌단제 50년(기원전 723년), 단제께서 언파불합 장군을 보내어 바다의 웅습(일본의 큐슈지방 또는 그 지역에 살던 민족)을 평정하였고 언파불합 장군의 아들은 그 지역의 왕이 되어 진무천황이라 불리운다. 36대 매륵단군 갑인 38년(기원전 667년) 배반명을 보내어 바다의 도적을 토벌케 하니 12월에 삼도(일본의 세개의 섬)가 모두 평정되었다. 배반명은 협야후에 책봉되었다.


8. 단군조선의 멸망

단군조선은 고도의 정신문화와 함께 엄청난 부를 누렸다. 그러나 중앙아시아를 지배하면서 2000년간 태평성대를 누린뒤 사람들은 사치해지고 나태하지고 게을러졌다. 특히 후단군 시대에 접어들면서 세력이 커지게 된 장수들이 차츰 말을 잘 듣지 않게 되었고 개인적인 욕망에 따라 이합집산 하게 되었다. 말기에는 반란도 일어나게 되고 고열가 단제 때에 이르러서는 그 깨달음으로 연결된 끈이 없어져 버렸으며 종래에는 멸망에까지 이르게 된다.

고열가 단제께서는 운이 다했음을 알고 이천년 후에나 이 민족에게 새로운 운이 돌아올 것을 보셨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시고는 "너무나 타락해서 깨달음을 전수해 줄 수 가 없다" 고 하신후 2천년 깨달음의 역사를 폐관하시고 아사달산으로 들어가셨다. (기원전 238년 3월)


9. 단군조선 역대기

47대 단군 2096년간 지속되었던 고조선의 역대 단군은 다음과 같다. ()안의 숫자는 재위기간이다.


 1대   단군 왕검 (93)
 2대   부루 단군 (58)
 3대   가륵 단군 (45)
 4대   오사구 단군 (38)
 5대   구을 단군 (16)

 6대   달문 단군 (36)
 7대   한율 단군 (54)
 8대   우서한 단군 (8)
 9대   아술 단군 (35)
10대   노을 단군 (59)

11대   도해 단군 (57)
12대   아한 단군 (52)
13대   흘달 단군 (61)
14대   고불 단군 (60)
15대   대음 단군 (51)

16대   위나 단군 (58)
17대   여을 단군 (68)
18대   동엄 단군 (49)
19대   구모소 단군 (55)
20대   고홀 단군 (43)

21대   소태 단군 (52)
22대   색불루 단군 (48)
23대   아홀 단군 (76)
24대   연나 단군 (11)
25대   솔나 단군 (88)

26대   추로 단군 (65)
27대   두밀 단군 (26)
28대   해모 단군 (28)
29대   마휴 단군 (34)
30대   내휴 단군 (35)

31대   등올 단군 (25)
32대   추밀 단군 (30)
33대   감물 단군 (24)
34대   오루문 단군 (23)
35대   사벌 단군 (68)

36대   매륵 단군 (58)
37대   마물 단군 (56)
38대   다물 단군 (45)
39대   두홀 단군 (36)
40대   달음 단군 (18)

41대   음차 단군 (20)
42대   을우지 단군 (10)
43대   물리 단군 (36)
44대   구물 단군 (20)
45대   여루 단군 (55)

46대   보을 단군 (46)
47대   고열가 단군 (58)



Ⅳ. 열국시대, 사국시대, 삼국쟁패시대, 남북국시대, 고려시대


1. 열국시대

1) 열국으로 분열

단군조선이 문을 닫자 그 자리에는 제후국들이었던 국가들이 혼란에 빠지면서 수 많은 나라로 나뉘어 졌는데 이를 열국시대라 한다.

그때의 나라는 부여, 가야, 낙랑, 남3한 75개국(남마한-월지국/모수/고탄자 등, 남변한-미리미동/접도/고자미동 등, 남진한-기저/불사/근기 등), 행인국, 비류국, 선비국, 오한국, 구다천국, 개마국, 주나국, 조나국, 남북 대방국, 이서국, 탐모라국, 실직국, 압독국, 고죽국, 왜, 읍루, 매금 등 수 많은 나라로 나누어졌다.


2) 위만조선의 실제

단군조선이 멸망하고 해모수가 북부여를 통치하고 있을 때(기원전 239년 건국) 중국에서는 진나라왕 정이 전국시대를 평정하고 단군만이 사용하던 황제라는 호칭을 사용하며(진시황)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다. 그후 지나 최초의 통일국가였던 진나라가 망하고 잦은 전쟁과 반란으로 정세가 불안해지자, 이전에 연나라가 있던 지방에 있는 한민족 계열의 인물인 위만이 무리 1천명을 이끌고 번조선에 망명을 요청하였다.

그후 위만은 속임수를 써서 번조선의 왕인 기준(준왕)의 정권을 빼앗아 번조선의 왕이 되었다. (기원전 194년) 이로부터 위만조선이 시작되었으며 그후 위만의 손자 우거왕 때까지 86년간 지속되었다.


3) 열국의 사회문화

단군조선 시대에는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이념이 정치, 교육등 전분야에서 실제적으로 실현되었던 것과는 달리 정치가 그 이념에서 분리되었다. 이때부터 정치는 홍익인간 이화세계라는 민족의 큰 비젼과 방향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4) 열국의 대외관계

열국은 구심점이 사라진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시야가 좁아져 이제는 동족끼리 전쟁을 했다. 그러므로 단군조선 시대처럼 대외적인 문제에 강력하게 대처하지 못했고 그 결과 대외적인 힘은 상당히 약해져 주도적으로 주변국들을 이끌 수가 없었다.

열국시대 당시 지나의 상황은 춘추 전국시대가 끝나고 시황제에 의한 통일이 이루어졌으나 폭정으로 15년만에 멸망하고 유방과 항우의 전쟁이 계속되다가 한나라가 건국되어 지나가 본격적으로 대국으로 성장, 발전하는 시기이다.


5) 한사군의 정체

한무제의 침입 당시(기원전 109년) 위만조선의 우거왕 정권은 무너졌지만 그것은 위만-우거-성기의 학정에 반발한 번조선(위만조선) 내부의 쿠데타에 의해서였다. 한나라 군대는 부여군, 낙랑군 등 연합군에게 패했을 뿐 옛 번조선의 영토는 결코 차지할 수 없었다.

한나라와의 전쟁에서 해전에 강한 낙랑국이 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한무제의 욕망을 저지하는데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고두막한은 위만조선이 망한 후 그 영지를 대부분 낙랑에 편입시켜 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영토를 셋으로 나누어 우거왕의 부하였던 세 장군에게 떼어주고 욕살(지방장관)을 삼아 잘 다스리게 했다. 이것이 한사군의 정체이며 한사군은 한나라와는 관계가 없는 후대에 왜곡된 이름이다.


2. 사국시대

1) 고구려

고구려는 고주몽이 세웠으며 이때의 연호는 다물이었다. 다물은 땅을 되물린다는 의미의 고구려 언어이며 단군조선의 잃어버린 정신과 영토를 다시 찾는다는 염원이 서린 말이다. 고구려는 지금까지 알려진 700년 역사가 아니라 9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천년왕국" 이었다.

고구려의 주변에는 세력팽창을 기도하는 강력한 적대국가들이 포진해 있었으며 춥고 토지가 척박한 환경이었으나 고토회복의 강력한 의지로 연이은 전쟁속에서도 빠르게 국력을 키워나갔다. 한반도 북부, 만주, 시베리아, 몽고에 걸친 대륙강국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주변소국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무력을 사용한 통합에 나섰다. 고구려는 단군조선 멸망후 요동지방에 진출했던 한의 세력을 이어받은 후한의 세력과 대결하기 시작했다.

고구려의 팽창정책에 두려움을 느낀 후한은 대무신제(대무신왕) 때 요동 태수가 이끄는 100만의 군사로 고구려를 침략하였다가 고구려군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물러간 적이 있었다.(서기 28년) 그후 고구려는 요서를 완전히 장악하여 후한의 위력을 위축시켰으며 요동지역 일부를 점령하였고 남쪽으로는 화북평야 일대를 차지하며 산동반도는 물론 그 너머에까지 영향력을 확대하여 후한과 더불어 명실공히 대륙의 맹주로 등장했다.


2) 백제

동복형제이며 부여계로 알려진 고온조와 고비류가 남하하여 고비류는 요서지역의 미추홀에 도읍하여 백제라는 나라를 건국하였고 고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하여 십제라 하였다가 영역이 넓어지면서 고비류의 백제와 통합하고 백제라 하였다.

고온조는 부여출신이라 하여 스스로의 성을 부여씨라 했다. 그리고 고류비의 백성들을 통합하여 백제가 건국될 당시 비류 왕족의 일부는 백제의 왕족이나 외척 또는 귀족이 되면서 백제 8대 성의 하나인 진씨나 우씨가 되었고 일부는 왜국에 건너가 지배층이 되었다. 백제 역시 주변의 소국을 병합하고 남마한의 영도적 국가였던 목지국까지 병합하면서 세력이 강성해졌다.

< 해양강국 백제 >

또 백제는 우수한 해양기술과 군사력으로 동북 아시아의 제해권을 잡은 해상강국이었다. 고온조(한반도의 중서부)와 고비류(중원의 요서지역)가 세운 십제와 백제가 통합한 이후 황해를 중심으로 세력권을 넓혀갔다.

그리하여 한반도와 요서지역, 산동성, 광서성, 하북성, 일본 열도, 류큐지역, 베트남 북부,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에서도 백제 담로의 흔적이 남아있다. 특히 중국에는 요서, 진평, 산동성, 양자강 유역의 오월지방에 7개의 백제군이라는 광대한 식민지를 개척해 담로를 두었다. (담로: 백제의 행정구역, 중국의 군현과 같다)


3) 신라

남진한의 한 국가로 출발한 사로국은 6개의 씨족을 기반으로 한 국가였는데 부여계의 박혁거세가 6촌 촌장의 추대를 받아 거서간이 되었고 국명을 사로라고 했다. 박혁거세의 자손이 왕위를 이어서 남해 차차웅, 유리 이사금으로 내려가다가 석탈해가 4대 왕인 탈해 이사금이 되었다. 또 김알지의 6대손인 김미추는 초대 김씨왕이 되었다.  서기 2-3세기를 거치는 동안 신라는 소국들을 병합하였고 박, 석, 김 세 씨족에서 지배세력이 교체되어 나왔다.

그러나 서기 4세기 내물 마립간 때에는 김씨족이 왕위를 세습하게 되었고 부족 연맹적 성격으로부터 벗어나 왕국으로 발전하였다. 이때까지도 신라는 국력이 약해 주변의 백제나 왜의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자청해서 고구려에 볼모를 보내고 지원을 요청하게 되었다. 광개토제는 군대를 파견하여 백제의 용병으로 신라의 국경을 침범하는 왜군들을 몰아내 주기도 하였다.

법흥왕 때 불교를 공인하였으며(서기 527년) 진흥왕 때 한강 유역과 대가야를 정복하여(서기 562년) 최대판도를 이루었다.


4) 가야

가야라는 나라 역시 단군조선 이후 민족의 분열시기에 이동하여 김해 등 낙동강 중하류 지역 남변한 땅을 중심으로 세워진 나라이다. 서기 42년 김수로왕이 구야국을 모태로 금관가야(본가야)를 세웠고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아라가야, 고령가야, 대가야, 성산가야, 소가야의 5가야가 연맹국가로 발전하였다.

가야는 특히 뛰어난 철기문화를 한반도와 왜국에 전파시켰으며 철기문화 등을 바탕으로 왜국에 분국까지 건설하며 500여 년간 해상강국을 이루었다. 가야왕국은 10대 구형왕이 다스리던 금관가야가 신라 법흥왕에게 병합당하였다.(서기 532년) 그후 금관가야의 지배층은 신라 귀족으로 흡수되었으며 훗날 김유신, 진지왕, 문무왕 등이 김수로왕의 후손이다.

대가야 또한 진흥왕이 보낸 이사부와 사다함에 의해 서기 562년에 신라에 병합되었고 이때 가야의 다른 9국도 함께 신라에 병합되어 가야는 건국 490년만에 멸망하였다.


5) 불교의 발전

사국은 모두 단군조선 시대의 문화인 화백제도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점점 강력한 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체제로의 이행이 필요해졌다. 그리하여 각 나라는수취제도의 정비, 관료체제의 정비, 율령정치 등을 시행하게 되었으며 이때에 즈음하여 각국의 왕실은 차례 차례 외래종교인 불교를 공인하였다. 왕권을 강화하는 이데올로기로써 불교를 공인하게 된 것이다.


3. 삼국쟁패시대

1) 고구려의 발전

< 고구려는 북방의 강국이었다 >

고구려는 광개토경호태왕(광개토대제), 장수홍제호태열제(장수왕), 문자호태열제(문자명왕)등의 치세기간을 거치면서 많은 국가들을 병합하여 세력이 더욱 강성해졌다. 그리고 백제의 세력권이었던 대륙의 제, 노, 오, 월 나라까지도 병합하여 모두 다스리게 되었다. 또 평강상호태열제(평원왕), 영양무원호태열제(영양왕)을 거치면서 그 세력은 더욱 커지고 번성하게 되었다.

이무렵 중원에서는 300년 가까이 계속된 위진 남북조 시대의 혼란이 선비족에 의해 세워진 수에 의하여 끝나게 되었다. 선비족은 대부분의 북방 기마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원래는 동이족에서 갈라져 나온 종족이었는데 세력이 커져 각국을 통합하자 고구려에 대해 전쟁을 일으켰다가 연전연패후 결국 멸망하고 만다. 수의 뒤를 이어 중원을 통일한 당역시 고구려를 제압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고구려를 침공해 왔으나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지나 대륙에서 서한-신-동한-위, 촉, 오-서진-동진, 5족의 16국-남북조의 9국-수-당에 이르기까지 무려 35개의 나라가 멸망하는 동안, 천년왕조(900년) 고구려는 북방의 방파제 그리고 겨레의 맏형 역할 다했던 것이다.

< 여수 전쟁 >

수나라가 중원을 통일한 후 고구려에 압력을 가하자 고구려는 말갈병 1만을 이끌고 요서 지방을 공략 선제공격을 가하였다. 같은 해인서기 598년 수나라의 양견(수문제)은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하였다가 섬멸되었다. 서기 612년 수 양제는 113만의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수의 수군 4만명이 평양 외곽에까지 진격하였으나 대패하였고 살아 돌아간 자가 몇천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초조해진 수의 양제는 30만의 별동대를 구성해 평양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을지문덕에게 살수에서 대패하여 30만명중 2,700여명만 살아남았다. 수양제는 그후에도 3차, 4차로 고구려를 쳐들어왔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드디어 고구려에 대한 무리한 침략전쟁과 잇다른 농민봉기 끝에 건국 37년 만에 멸망하고 북위의 군벌이었던 이연이 새로운 왕조를 수립하니 그가 당나라 고조이다. (서기 618년)

< 여당 전쟁 >

신흥국가인 당은 초기에는 고구려와 친선관계를 유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서기 627년 이세민이 태종으로 즉위하자 고구려와 전쟁을 일으키고자 하는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태종은 돌궐과 위구르를 복속시키고 비단길을 다시 장악하여 서역정벌을 끝냈으며(서기 640년) 드디어 고구려를 정복할 야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서기 644년 당태종 이세민은 요동이 원래 지나족의 영토이며 수나라가 네번이나 출병해서 모두 패했으니 이의 원수를 갚겠다는 명분으로 침략을 시작하였다. 당태종은 서기 645년 전선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안시성 성주인 양만춘의 지도력과 안시성 주민, 병사들의 합심으로 당태종은 한쪽 눈에 부상을 입은 채 쫓겨가게 되었다.

연개소문은 추정국, 양만춘 등이 이끄는 군사 수만명을 이끌고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에 입성하여 이세민과 조약을 맺어 산서성, 하북성, 산동성, 강좌(양자강 북쪽)가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그후 당태종은 활에 맞은 눈의 상처가 악회되어 "절대로 고구려를 건들지 말라"는 유연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게 된다.


2) 신라의 삼국통일

< 나당 연합군 결성 >

신라의 김춘추가 고구려의 연개소문을 찾아가 신라를 지원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실패한 후 신라는 적극적으로 당에 의존하는 외교를 펴 나갔다. 그리고 김춘추가 태종무열왕이 되자(서기 654년) 신라와 당의 군사적 동맹까지 이루어지게 되었다. 고구려에게 참패를 당했던 당나라는 신라와의 동맹을 이용해 고구려를 공격하여 설욕하고자 하였으나 신라는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서는 먼저 백제를 정벌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한편 백제는 건국 이후 점차 단군조선의 해상지배권을 회복하기 시작하여 신라, 고구려, 수나라, 당나라를 제치고 절대적인 해상 지배권을 누리고 있었다. 당나라는 그런한 백제를 대륙에서 몰아내고 싶었기 때문에 백제를 먼저 치자는 신라의 제의를 기꺼이 받아들이게 된다.

< 백제의 멸망 >

신라군과 당군은 서기 660년 신라군과 당군은 육로와 해로 양면으로 백제를 공격하였다. 김유신이 이끄는 5만명의 신라군은 탄현을 넘어 황산벌에 이르러 계백장군이 이끄는 백제군을 간신히 격파하고 사비성을 포위하였다. 이때 백제의 명장 계백장군과 5천명의 결사대는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황산벌에서 장려하게 전원 산화했다.

백제는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당군에게 항복하게 되었다. (서기 660년) 700년 역사의 백제는 멸망하고 소정방은 승전연회를 열어 의자왕에게 술을 따르게 하고 의자왕과 왕족, 신하 88인과 백성 12,807명을 데리고 당나라로 돌아갔으며 의자왕은 얼마 후 그곳에서 병사했다.

< 고구려의 멸망 >

백제가 멸망할 무렵 고구려는 60년간에 걸친 수, 당과의 전쟁에서 많은 국력을 소모하였고 백성들의 생활은 파탄에 직면하였고 국가의 재정이 많이 탕진되어 있었다. 이와는 반대로 당은 한때 고구려에게 크게 패하고 수도까지 점령당했지만 신흥국가로서 세력이 날로 강해지고 있었다. 때문에 고구려를 정벌할 욕심이 있었고 이에 대한 전초작업으로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후에 고구려를 침공하게 되었다.(서기 661년)

당의 소정방은 35만의 군대를 이끌고 해로를 통해 직접 평양성으로 전진하였으나 실패하고 퇴각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실권자였던 연개소문이 사망한 후(서기 665년) 연남생 형제간에 정권쟁탈전이 벌어져 국가가 분열되고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당은 고구려의 이러한 분열을 놓치지 않고 이세적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침공하게 하였다.(서기 667년, 보장제 26년)

보장제(보장왕)은 필사적으로 1년 동안 항거하였으나 마침내 당군에 굴복하고 900년 역사의 고구려는 멸망하고 말았다. (서기 668년) 이세적은 보장제를 비롯한 다수의 귀족과 20여만명의 고구려인을 포로로 잡아갔다. 그리고 고구려의 영토에 9도독부를 설치하여 군정을 실시하였다.


3) 일본의 독립

< 왜국에서의 백제복국 운동 >

백제가 멸망한 후 의자왕의 누이동생이며 당시 왜국의 37대 천황이었던 보황녀(사이메이 여제)는 자신의 친정인 백제의 복국운동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왜병 수만명을 백촌강을 통해 사비성에 파견하였지만 왜국 군대는 백촌강에서 당군과 싸워 군선 400척을 잃고 패배하였다.

왜인들은 선조들의 국가이자 왜나라의 상국이 멸망한데 절망하여 "주유가 이미 항복하였다. 어찌 할 수 없다. 백제의 이름이 오늘에 이르러 끊어졌다. 이제부터는 조상의 묘소에도 갈 수가 없다."라고 탄식하며 왜국으로 돌아갔다.

< 일본의 탄생 >

백제가 멸망하자 왜국의 주민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때까지의 왜나라 역사는 그대로 한국 고대사의 일부였는데 본국인 백제가 멸망함으로써 국가적인 연결고리가 갑자기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자왕의 동생인 제명여제가 죽자 의자왕의 또다른 아들인 부여용을 받들어 천지천황이라 하고 나라이름을 일본(해뜨는 곳)이라고 바꾸었다. (기원후 668년)
 
< 역사 만들기 작업 >

나라이름을 바꾸는 동시에 가야, 신라, 백제등의 혈통적 문화적 흔적을 철저히 지우는 작업이 행해졌는데 그것은 바로 "일본서기", "고사기", "신찬성씨록" 등 이른바 일본의 3대 사서 편찬 작업이다. 이때부터 왜열도는 한민족의 영토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었고 왜국의 역사는 한민족사의 일부가 아니라 별개의 역사로 독립해 나가게 된다.


4. 남북국 시대


1) 대진국

< 대진국의 생성 >

고구려의 마지막 임금인 보장제의 아들로 알려진 고덕무는 대조영으로 성씨개명하고 고구려의 유민들을 이끌고 길림성의 돈화현 동모산을 중심으로 대진국을 세웠다. (서기 698년) 원래 진국은 단군조선을 부르던 이름중 하나였다. 대진의 영토는 5,000리, 번성기에는 9,000리에 이르렀으며 역사는 229년간 지속되었다. 지나인들은 대진국이 발해만의 저쪽에 있다하여 "발해"라고 불렀다.

대진국은 스스로를 단군조선과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 자처했다. 체제가 정비되고 국력이 신장되면서 만주와 연해주에 걸쳐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다.

< 대진국의 발전 >

1대 고황제(대조영)의 아들인 2대 무황제(대무예)는 말갈족중 독립을 끝까지 고집하던 흑수말갈을 대진의 연맹에 복속키켰고 마침내 당나라와 세력균형을 이루어냈다. 3대 문황제(문왕=대흠무)때는 한단시대부터 이어져 오던 국가 교육기관인 태학을 다시 설립하고 한민족의 이념과 한단고사를 가르쳤다.

8세기 초에는 당과 대결하면서 확장 정책을 써 국가 기반을 확실히 하였다. 지나의 역사책에도 당시 대진국의 위상에 대해 "동북지방의 여러 민족들이 두려워 복종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8세기 후반에 대대적으로 지배 체제의 정비에 힘을 기울였다. 한편 당과 친교관계를 유지하며 당나라의 문화를 수입하여 문화의 발전에 이용하게 된다.

9세기 들어 대진국은 크게 융성하여 이름을 널리 떨쳤으며 10대 선황제(선왕:대인수 818-830) 때는 "해동성국" 이란 칭호를 듣게 된다. 고구려 문화를 기본으로 하고 당의 문화를 받아들여 재구성한 대진의 문화가 꽃 피운 시기이다. 이때 발해 사람 셋이면 호랑이 한 마리를 잡는다는 말이 생겼다. 대진의 수도인 상경은 만주지역 문화의 중심지였고 이러한 대진의 문화는 다시 일본으로 전해졌다.

< 대진국의 멸망 >

발해는 당나라식 문물과 불교를 수용하면서 주체성이 흐려져 갔다. 10대 선황제(선왕:대인수)가 강력히 추진했던 중앙 집권화 과정은 다른 종족들을 존중해 오던 대진국 연맹체의 전통을 깨트리는 것이기 때문에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거란은 북부여족 중심의 중앙 집권화에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고 대진국 15대 애제에 이르러 수도 상경을 점령하고 대진국을 멸망시켜 버렸다. (서기 926년)


2) 남북국시대의 신라

< 왕권 강화 >

신라는 이른바 삼국을 통일하여 그 영역이 크게 확대되었으며 대외관계가 안정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나가게 되었다.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가장 큰 정치적 변화는 왕권이 전제화 되었다는 것이다. 통일을 전후하여 유교정치 이념이 도입되고 중앙 집권적 관료정치가 발달되었으며 왕실의 권위가 높아짐으로써 왕권은 더욱 강화되어갔다.

< 당의 영향 >

후기 신라에 접어들면서 신라는 본격적으로 불교 국가가 되었고 정치 이념으로는 유교라는 새로운 사상을 통해 나라를 이끌어 가게 되었다. 귀족 자제들에게 유교를 가르치기 위해 국학을 세웠고 시험 제도를 통해 유학을 공부한 관리를 채용하는 독서삼품과가 설치되었으며 의복 풍속은 당나라식으로 바뀌었다.

< 귀족사회의 타락 >

삼국중 가장 세력이 약했던 신라는 통일 이후 안정적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국가의 생존을 위해 하나도 단결되었던 신라인들은 외부의 위협이 없어지자 점차 분열과 부패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문무왕 때에 통일왕국이 이루어지면서 신라의 경제생활은 더욱 귀족 중심으로 이루어져 갔고 귀족 문화의 발달이 절정에 달하면서 지배층의 생활은 사치스러워졌다.

정치적으로는 귀족의 세력이 약화되었지만 귀족들의 토지소유와 국교인 불교사원의 면세토지가 날로 증가하였다. 그 결과 국가경제는 점점 위태롭게 되었으나 왕족과 귀족들은 경주에 호화주택과 별장을 짓고 향락생활을 즐겼으며 중기이후에 생겨난 이런 현상은 말기로 내려오면서 더욱 심해졌다. 그리하여 점차 전날의 굳건했던 기상은 사라지고 사회는 동요되어 갔다.


3) 후삼국 시대

이러한 상황속에서 지방세력인 호족들이 점차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여 중앙정부에 항거하였다. 이들 지방세력들은 중앙정부의 힘이 점점 약해지자 그 통제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그 지방의 백성들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스스로 성주 혹은 장군이라고 칭하면서 사병을 보유하여 그 지방의 행정권과 군사력을 장악하고 경제적인 지배력까지 행사하였다.

이러한 신라말의 혼란기에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 신라조정에 대항하는 이들이 나타났으며 그 대표적인 인물이 견훤과 궁예였다. 그들이 세운 나라가 후백제와 후고구려이며 일반적으로 후기 신라와 함께 후삼국이라 한다.

< 후백제 >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견훤은 지방의 군사세력과 호족세력들을 토대로 완산주(지금의 전주)에서 후백제를 건국하였다.(서기 900년) 그 세력권이 전라 남북도와 충청 남부에 이르렀다.

< 후고구려 >

궁예는 지방의 실력자 양길의 휘하에 들어가서 그의 신임을 얻어 장군에 추대되고 인제, 양구, 철원 일대를 손에 넣었다. 철원을 근거지로 세력을 넓혀간 궁예는 왕위에 올라 나라이름을 후고구려(혹은 태봉)라 했다. (서기 901년) 세력권은 강원도, 경기도, 충청북도에 이르렀다.

< 신라 >

후백제와 후고구려의 세력이 점점 커지면서 신라는 날로 쇠잔해져서 그 세력권이 지금의 경상도 지역으로 줄어 들었다. 이는 결국 초기의 영역으로 되돌아간 셈이다. 이마저도 지킬 힘이 없어 고려에 흡수되어갔다.


4) 고려의 탄생과 신라의 멸망

< 고려의 탄생과정 >

왕건은 원래궁예 휘하의 장군이었다. 그러나 궁예의 폭정이 심해지자 신하들은(홍유, 배현경, 신승겸, 복지겸 등) 궁예를 내쫓고 왕건을 새왕으로 추대하였다. 이렇게 해서 왕건은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하며 고려를 건국하였고 연호를 "천수"라고 하였다.(서기 918년)

< 왕건의 유화정책 >

후삼국 시대 초기에는 후고구려가, 나중에는 후백제가 주도권을 잡았다. 그러나 견훤은 신라의 금성에 기습해 들어가 경애왕을 죽이고 왕비를 욕보이는 등 약탈을 자행하여 신라인들의 인심을 잃었다. 후백제의 세력이 날로 커지자 신라는 고려와 손을 잡고 후백제를 견제하였으며 포용성있는 정책으로 왕건은 신라인들의 마음을 얻었다.

< 고려의 통일 >

결국 신라 경순왕은 싸움한번 못 해보고 천년사직의 신라를 포기한 채 백관들을 이끌고 왕건에게 투항해 왔다. (경순왕 9년, 서기 935년) 그 다음해 왕건에게 투항한 견훤을 앞장세운 고려군은 후백제까지 멸망시키고(서기 936년) 후삼국 통일을 이루었다.

이무렵 거란족에게 멸망당한 대진국(발해)의 고구려계 지배층의 다수가 고려로 망명해 왔다. 왕건은 대진국의 세자인 대광현에게는 왕계라는 왕씨 성과 이름을 내리고 종적에 올렸으며 선조에 대한 제사를 받들게 하는 등 귀순해 오는 발해유민 모두를 받아 들여 후대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은 이러한 포용성있는 정책으로 후고구려, 신라, 후백제를 하나 하나 흡수하였으며 발해의 유민들까지 받아들여 왕위에 오른지 19년 만에 한반도 재통일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결국 왕건은 천년 역사를 자랑하는 신라를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손에 넣었으며 이로써 신라는 56대 992년 만에 멸망하였다.


5. 고려 시대

1) 과거 제도의 수입과 왕권 강화

과거제는 고려 광종 때 지나(중국)사람인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958년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그후 과거를 볼 수 있는 지식인 들은 모두 유학을 공부하였고 유교의 경전은 관리가 되기 위한 교과서가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사상을 통제할 수 있었고 간접적으로 지방까지 중앙에서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과거를 통해 정계에 진출한 세력들은 요직을 차지해가며 호족세력에 대한 대대적 견제정책을 실시하는 일종의 친위대 역할을 했다. 다시 말해 과거제는 세력이 컸던 지방 호족들을 해체시켰으며 이 과거제를 통해서 호족과 신진세력들은 국왕의 충성스러운 관료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몇 대를 지나면서 또다시 새로운 특권층으로 성장했으며 그들이 고려시대의 이른바 문벌귀족이 되었다.


2) 묘청의 고려 재건국 운동

< 시대적 배경 >

고려 중기 특히 문종 이후의 시기는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어 외척세력으로 자리잡은 인주 이씨의 전횡이 두드러진 역사였으며 인종 때에는 이자겸이 득세하고 있었다. 이때 나라밖에서는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부르던 여진족들이 세운 금나라가 고려에 대해 형제관계를 요구하더니, 드디어는 군신관계까지 요구하고 있었다.

이때 정권을 잡고 있던 이자겸 일파는 자신들의 권력을 보전하기 위해 금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여 굴욕적인 사대를 하였고 나라안으로는 세력이 더 커지자 스스로 왕이 되려고 반란을 일르켰다.(이자겸의 난, 1127년)

< 칭제건원과 북벌론 >

이러한 시기에 묘청은 금나라에 대한 굴욕적 사대로 인해 짓밟힌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고 건국이래 고려의 기본정책인 북진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금나라를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칭제건원(왕을 황제라 칭하며 중국과 다른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할 것)과 서경 천도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개경(개성)을 중심으로 한 자신들의 권력과 기득권을 잃을 것이 두려운 김부식일 비롯한 문벌귀족은 이를 반대하고 현상유지를 고집하였다.

< 묘청의 북벌 운동 >

묘청은 김부식 일파의 강력한 반발로 왕의 마음이 바뀌어 서경천도 계획이 좌절되자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자신의 이상을 실현해야겠다고 결심하고 군사를 일으켰다.(1135년) 묘청 일파는 개경중심의 보수적 정권을 부정하고 새로운 정부를 세웠는데 나라이름을 대위, 연호는 천개, 편성된 군대는 천견충의군(하늘이 보낸 충의의 군사라는 뜻)이라 하였다.

서경군은 끈질긴 저항을 하였으나 진압군 총사령관인 김부식이 유도한 내부분열로 서경군의 핵심 지도자 중 하나인 조광이 지도자인 묘청을 살해하였다. 그리고 투항의 사자를 개경으로 보내는 등 내부분열과 군량부족으로 결국 서경이 함락되고 반란은 진압되었다.


3) 고려말의 상황

< 무신의 난 >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 실패이후 권력을 잡게 된 문벌 귀족이나 무신들 즉 고려후기 지배층의 정신은 점차 개인 욕심으로 타락해 갔으며 그 결과 나라를 지킬 힘이 더욱 쇠잔해지게 되었다. 마침내 귀족들 사이에 대립과 갈등이 심화되면서 결국 안으로는 무신정변이 일어나 기존의 정치 질서가 무너져 갔다.

< 몽고족의 침입 >

그리고 밖으로는 몽고의 침략을 받아 국토가 유린되고 민생이 피폐해졌다. 작은 부족에 불과했던 몽고족이 원나라를 세우고(1271년) 중국대륙을 통일했으며 그 여세를 몰아 고려에 침입해 온 것이다.(1231년, 고려멸망 161년전) 1231년에 시작된 몽고와의 전쟁은 약 30년간 지속되었다. 당시 강화도로 도망간 최우 정권은 그 와중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몽고와의 싸움은 커녕 향락과 사냥에 빠져있었다.

그 잔인한 몽고군의 손에서 나라를 구한 것은 오히려 무시받고 천대받던 농민군, 천민군 그리고 해산명령이 내려진 삼별초 군인들이었다. 그들의 용맹한 저항이 있었기에 "초토화 작전"으로 유명한 몽고군과 30년이나 항전할 수 있었다, 몽고군과 맞서 30년이나 항전한 것은 그나마 세계에서 고려가 유일했다.

< 원나라의 간접지배 >

몽고는 1271년 북경으로 수도를 옮기고 나라 이름을 원이라 바꾸었다. 1270년 고려의 개경 환도 후부터 시작된 원나라의 고려지배는 그후 약 100년 동안 지속 되었다. 원의 지배방식은 고려 왕실을 통한 간접 통치였다. 고려의 국가로서의 존립은 같은 기마민족의 우애로서 인정해주되 문제가 생기면 사신을 보내 자초지종을 따지거나 혹은 왕을 갈아 치웠다. 충열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등 고려왕의 시호에 붙은 "충"은 바로 원에 충성한다는 뜻이었다.


4) 고려의 멸망

< 고려말의 주변 정세 >

14세기 후반 들어 중국 대륙은 전환기를 맞고 있었다. 기마 종족의 한 갈래인 몽고족이 세운 원의 세력이 약해지고 명나라가 건국되었다. (1356년) 이러한 대륙의 정세변화에 따라 친원파가 수그러들고 명나라와 가까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친명파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1351년에 즉위한 공민왕은 원의 지배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본격적인 반원 자주화 개혁정치를 폈다.

그러나 노국공주의 사망으로 방황하던 공민왕 또한 환관 최만생에 의해 살해됨으로써(1371년) 공민왕의 개혁정치는 중단되고 만다. 그후 신진사대부라는 새로운 새력이 중앙 정치무대에 자리잡게 되었다.

< 친원파와 친명파 >

최영을 비롯한 친원파들은 원나라와 전술적으로 제휴한 뒤 명나라와 일전을 벌여 요동을 확고히 치지함으로써 북방진출의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최영의 새로운 친원론에 이성계, 정도전 등의 친명파는 반발하였다.
 
드디어 우왕과 최영은 요동정벌을 계획하였으나(우왕 14년, 1388년) 이성계는 요동정벌을 극력 반대하고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진격하라는 최영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군대를 돌려 거꾸로 수도 개경으로 향해 진격하였고 손쉽게 개경을 손에 넣은 이성계 일파는 권문세력의 대표 최영을 귀양보냈다가 두달 후 처형했다.

< 정몽주의 죽음과 고려의 멸망 >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 일파는 온건파와 급진파로 갈리게 된다. 급진파는 이른바 "역성혁명"을 주장하며 왕조교체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는 개혁은 하되 고려의 틀을 유지한다는 온건파의 생각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왕조교체를 끝까지 반대하던 온건파의 태두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이성계의 아들 방원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공양왕 4년, 1392년) 그리고 그해 7월 공양왕은 폐위되어 원주로 쫓겨가고 이성계가 왕위에 올라 새 왕조를 열었다.



Ⅴ. 조선시대, 일제 시대


1. 조선 시대

1) 조선의 정신-유교(성리학)

조선왕조를 연 주인공들은 신진사대부들과 태조 이성계를 대표로 하는 신흥무인들이었다. (1392년) 그들은 새 나라의 정신을 본격적으로 유교로 바꾸었고 특히 성리학을 받아들였다. 고려의 국교이던 불교를 계속 믿게 하면 통치하기가 힘이 들기 때문에 조선의 기본이념을 유교로 바꾼 것이다.

성리학은 원래 유교의 한 일파로 중국 송나라 때 주희에 의해 그 사상체계와 연구방법이 집대성된 학문이다. 그래서 주자학, 정주학, 송학이라고도 한다. 초기의 유교는 한문에 대한 소양을 중시했지만 중국에서 과거제를 도입하면서부터 유교는 학문이면서 곧 지배층의 정치이념이 되었다. 유교중에서도 성리학이 들어온 것은 13세기 고려말의 일
이다.

성리학에서는 인간에게 본연의 성(도덕적 본성)과 기질의 성(본능)이 있으며 각각 선과 악을 대표한다고 구분지었다. 그래서 인간은 도덕실천을 통해서 본연의 성에 따라 생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구체적 내용이 바로 삼강오륜을 중심으로 하는 유교적 윤리도덕이었다.

그러한 성리학을 국시로 채택한 조선은 결국 가부장 중심의 철저한 남성위주. 엄격한 신분제. 관료제의 나라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너무나 이론적으로 치우치게 된 조선의 양반들은 당쟁으로 사분오열되었고 지배층은 이기심과 욕심으로 타락하였다. 시대의 흐름에도 뒤지고 힘도 없는 폐쇠적인 나라-조선은 결국 제국주의의 희생이 된 것이다.


2) 임진왜란

< 일본의 통일 >


조선은 옛부터 여진족과 일본을 야만인들이라고 멸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백제의 멸망을 계기로 일본은 한민족으로부터 정신적인 독립을 했고(668년 일본으로 국호 변경), 그후 막부체제가 시작되면서 눈부신 성장을 거듭했다. 그리고 전국시대가 시작된 지 100여년 만에 치열했던 내란을 종식시킨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통일이 이루어졌다.(1590년)


그러나 통일은 이루어냈지만 호전적인 무사들이 언제 반란을 일으킬 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사무라이들의 호전적인 에너지를 밖으로 분출시키기 위해 조선침략을 감행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임진왜란이다.(1592년)


< 임진왜란 >


서산대사, 사명대사, 율곡선생 등과 같은 선각자들은 오래전부터 임진왜란을 이미 예견하고 있었고 특히 율곡 선생은 이를 대비해 십만 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때 정치가들은 당리당략에 눈이 어두워서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조선의 조정이 동인이다, 서인이다 하며 당쟁에 정신이 팔려있을 때 일본은 유럽의 신무기인 조총을 들여와 대량생산하여 전쟁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드디어 부산진을 단숨에 함락시킨 왜군은 한달만에 수도인 한양을 그리고 두달만에 평양을 함락시켰다. 이렇듯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울 때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들과 명나라에서 파병된 원군 그리고 이순신 장군의 활약에 의해 왜적들은 7년만에 이 땅에서 쫓겨갔다.


3) 병자호란

중국대륙의 패권을 놓고 떠오르는 태양인 청나라와 지는 해 격인 명나라가 마지막 결전을 벌일 때, 당시 조선의 조정은 두가지로 의견이 나뉘었다. 그때는 명나라에서 공부했던 명분론자들이 동방예의지국을 운운하며 명나라를 도와야 한다고 했다. 반면 젊은 소장파들은 실리를 찾자고 말했다.


유교가 기본정신 이었던 이조시대 인조임금의 조정은 결국 대의명분을 선택했다. 그렇게 명분을 쫓아서 조선이 지원했던 명나라는 결국 망했고 청나라는 대륙통일을 완전히 이루어 냈다. 통일을 이룩한 후 청나라가 조선에 대한 보복으로 쳐들어 온 것이 바로 병자호란이다.


그리고 1637년 1월 30일 현재 송파구 석촌호수 자리인 삼전도에서 치욕의 항복의식이 치러졌다. 우리 역사상 그처럼 완전한 패배는 없었다. 그래서 청나라의 일방적 요구와 행패는 더욱 더 끝이 없었다.


4) 동학

< 시대적인 상황 >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격은 이후 유교적인 이조의 양반사회는 달라진 점이 거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체제유지를 위해 통치기구를 개편했고 오히려 끼리끼리 모이는 붕당을 더욱 조장하여 기득권을 더욱 강화하려 했을 뿐이었다. 정조임금 이후 나이어린 순조가 즉위하면서 외척들 특히 안동 김씨들이 정치적 실권을 잡고 중앙정치를 뒤흔들고 있었다.


이를 세도정치라고 하는데 이때에는 세력가와 연줄이 닿으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었고 돈을 받고 관직을 파는 매관매직이 성행하였다. 그렇게 돈으로 벼슬자리를 얻은 관리들은 투자한 밑천을 거둬들이기 위해 재임기간 동안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백성들을 착취했다.


드디어 19세기 중엽에 이르자 조선의 전통사회는 사방에서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안으로는 부패하고 무능한 양반 지배 체제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이 커져 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고(1812년 홍경래의 난) 밖으로는 일본과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세력들이 이 땅으로 몰려들었다.


1860년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이 청나라의 수도 북경을 함락시켰다. 대국으로 섬겨온 중국이 하찮은 서양 오랑캐라 생각했던 외국군대에게 하루아침에 무릎을 꿇은 사실은 당시 조선인들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다. 똑같은 일이 언제 닥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커지기 시작했으며 나라의 장래를 조금이라도 걱정하는 사람들은 밤잠을 설치곤 했다.


서양인들로부터 강제적인 개국을 당하고 근대화를 시작한 일본(1868년 메이지 유신)은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보다  더 집요한 방법으로 조선을 침략하게 된다. 일본 상인들이 최저가로 사들인 조선의 쌀은 90% 이상이 일본으로 들어갔고 그들이 서양에서 값싸게 사들인 수입품을 조선에 최고가로 팔아 넘겼다. 이러한 일본의 경제적 침탈은 조선의 농촌사회를 더욱 황폐하게 만들었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는 권력층의 농민에 대한 수탈은 더욱 가중되었다.


< 동학의 창시배경 >


지배층의 타락과 부패 그리고 외세의 경제적 수탈은 나날이 더욱 심해져 그렇잖아도 살기 힘든 농민들의 삶은 말이 아니었다. 도저히 견뎌낼 수가 없어 야반도주라도 하면 남은 친척과 이웃들이 연대책임을 지고 도망간 사람들의 몫까지 세금을 치러야 했다. 부패한 지방관리들과 손을 잡고 농민들을 혹독하게 괴롭힌 이들은 바로 그 고을 출신의 아전, 양반, 토호들이었다.


그러한 양반들이 추구해 온 성리학은 이제 더 이상 시대적 요청을 해결해 줄 수 없었다. 이러한 민족정신의 부재와 한계에 도달한 성리학적 가치관에 대한 백성들의 반발을 틈타 서양에서 들어온 서학(천주교)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 수운 최제우 선생 >


이와같은 조선의 현실을 안타까와하고 고통스럽게 받아들이며 민족의 장래를 걱정했던 사람중의 한명이 바로 동학의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였다. 그는 "병든 세상을 바로 잡고 새롭게 후천세계를 열겠다"며 동학을 일으켰다. 그 세력이 경상, 전라, 충청, 강원도로 불길같이 번져가자 조정은 동학에 은근히 겁을 먹고 혹세무민으로 체포, 처형해 버렸다.(1864년)


동학은 신분이나 계급을 초월한 인간평등의 추구와 남녀차별 타파, 인도주의를 지향하였다. 또 농민층을 바탕으로 보국안민을 주장하며 현실을 개혁하려 하였으며 서양과 일본 등 외세침투를 배척하였고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강하게 규탄하였다.


해월 최시형이 2대 교주로 있을 당시는 대원군이 집권했을 때 였다. 대원군은 천주교를 심하게 박해했으나 동학은 그대로 두어 안정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때 각 지방 농촌으로 퍼져나가 교세가 확장되면서 훗날 동학 농민 혁명으로 발전하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 동학의 전개과정 >


제 1기: 최제우의 동학 창시 (1860년)


제 2기: 교조 신원 운동(1892~1893년)


제 3기: 고부 민란(1894. 1.10)


고부군수 조병갑의 횡포와 착취에 항거하여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전봉준은 1천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관아를 습격한 후 군수를 내쫓고 아전들을 징벌했으며 곡식을 농민들에게 나눠준 뒤 10일만에 해산했다.



제 4기: 동학 농민 온동의 절정기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의 지도하에 동학 농민군이 보국안민, 제폭구민을 내걸었던 시기이다. 동학 농민군은 관군을 물리치고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제 5기: 전주화약(1894. 5. 8)


동학 농민군이 정부와 전주화약을 맺고 전라도 일대에 집강소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제시한 폐정 개혁안을 실천에 옮긴 시기이다. 이때 정부는 동학군의 요구를 실천할 의지가 없었고 그들을 진압할 능력도 없었다. 드디어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했고 청나라의 군사가 들어오자 일본도 천진조약을 구실삼아 군대를 보냈다. 그리고 양국간에 청일전쟁이 벌어졌다.



제 6기: 우금치 전투(1894.11)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의 내정에 본격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항하여 안으로는 반봉건의 개혁정치를 요구했고 밖으로는 일본 등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려는 대규모의 농민군이 다시 일어났다. 동학군은 공주의 우금치에서 관군과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대격전을 벌였다. 마침내 전봉준 등 지도자들이 체포되었고 수없이 많은 희생(20만~50만)을 치르고 동학 농민 운동이 실패로 돌아갔다.



2. 일제 시대

1) 세계의 정세

* 제국주의

- 우월한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다른 나라나 민족을 정벌하여 대국가를 건설하려는 침략주의적 경향
- 막강한 군사적·경제적 힘을 가지고 다른 나라를 억눌러 자기 나라의 이익을 실현하려는 정책
- 직접적인 영토 획득이나 다른 지역에서 정치적·경제적 통제력을 얻어 세력이나 지배권을 확장시키려는 국가정책 또는 관행
- 제국주의는 군사력이든 또는 이것보다 교묘한 형태이든 힘의 사용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비난받아야 한다고 여겨진다

< 제국주의 시대 >

19세기는 제국주의의 시대였다. 서구 제국주의 국가는 남아도는 과잉 자본을 처리하기 위해 후진국을 식민지로 만들어 자기네 나라를 위한 시장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경쟁에 나서게 된다. 영국, 미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이탈리아 등의 독점 자본주의 국가들은 세계 곳곳에 더 많은 식민지를 확보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자기들끼리의 크고 작은 충돌이 그치지 않는 가운데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인도, 중국, 인도차이나 반도 등이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가 되었다.

< 제국주의 국가의 거래 >

일본은 미국에 의해 강제로 개국하게 되었다.(1854년) 그후 천황과 관료중심의 메이지 정부는 적극적으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며 일본의 힘을 키우고 무장시켜 갔다.(1869년) 그후 일본은 급속한 근대화 정책을 추친하여 자본주의화 되면서 뒤늦게 제국주의 대열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당시 미국과 영국은 극동 아시아 지역에서 러시아의 팽창을 원하지 않았다.

미국과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하는 동시에 이 지역에서 영.미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영향력을 계속 행사하기 위해 일본을 지원했고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다.


2) 대한제국과 만민공동회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난해 간 아관파천 때 제국주의 열강들은 다투어 극심하게 이권침탈을 해갔다. 고종은 1년 만에 환궁하여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라 하고 원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1897년) 이어서 고종은 황제권을 강화하고 개혁정치를 실시하려 했다. 1898년 만민공동회가 열렸고 헌의6조가 결정되어 다음 날 고종의 시행약속을 받았으나 불발에 그쳤다. 결국 최초의 의회 설립 운동은 무산되고 수구파가 다시 정권을 잡았다.


3)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침략 과정

< 강제 개항 >

일본은 근대적 외교를 모르고 있던 조선과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1876년)을 맺어 온갖 경제적 이득과 조선에 대한 독점적 주도권을 확보하였다.

<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

민씨정권 타도와 일본 세력 퇴치를 기치로 구식군대가 난을 일으킨 것이 임오군란(1882년) 이다. 해산된 군대는 의병과 독립군으로 연결되었다. 임오군란으로 청나라의 간섭이 심해지자 민씨 일파는 친청수구파로 변질되었다. 그러자 개화당은 민씨정권을 타도하고 정권을 장악해야만 근대적인 개혁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일본공사의 후원하에 수구파 요인들을 살해하고 개화당 정부를 수립한 것이 이른바 갑신정변이다.(1884년)

< 청일전쟁과 을미사변 >

사회개혁과 반외세의 구호로 전통사상 중심의 자주적 개혁을 요구한 동학 농민혁명(1894년)이 일어나자 부패한 민씨정권은 청나라에 군대파견을 요청했다. 조선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일본은 천진조약을 구실삼아 군대를 파견했다. 일본은 청나라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제세했고 이 기회에 조선에서 청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선전포고를 하여 조선 땅에서 청일전쟁이 벌어졌다.

청일전쟁 승리후 일본군은 정부군과 함께 동학 혁명군을 무참하게 진압했다. 그후 요동지역까지 점령하려던 일본의 야욕을 독일, 프랑스의 협조로 러시아가 좌절시킨 것이 이른바 삼국 간섭이다. 그후 일본의 간섭을 꺼려하던 조선정부에서는 친러내각이 구성되었다.

민씨일파가 친러로 돌아서자 자극받은 일본은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무단파인 미우라를 공사로 파견했고 미우라는 일본 깡패들과 군인을 동원 남의 나라 왕비인 명성황후를 궁성에서 살해하고 불살라버린 세계역사상 전무후무한 만해을 저질렀으니 이것이 을미사변(1894년)이다.

이후 명성황후 살해범 미우라 일당은 조선이 아닌 자기나라 법정인 히로시마 법원에서 형식적인 재판을 받았고 증거불충분이라는 이유로 전원석방 되었다.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 민비를 제거한 일본은 친일내각을 세우고 단발령을 실시, 강력한 항일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 러일전쟁에서 한일합방까지 >

을미사변 이후 러시아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으며 조선을 가운데 놓고 러시아의 욕심과 일본의 욕심이 군사적으로 충돌한 것이 러일전쟁(1904년)이며 영국, 미국의 지원하에 일본은 또다시 승자가 되었다. 결국 일본은 미국, 영국과 손잡고 러시아를 견제하면서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하는 대가로 조선에 대한 지배를 인정받았으며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도 일본의 조선지배를 인정하게 되어 조선은 완전히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이후 일본은 조선정부를 무력으로 협박하여 을사보호조약(1905년)을 맺어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했으며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퇴위 시켰다. 다음으로 정미7조약(1907년)을 맺어 조선의 전권을 장악하고 군대를 해산시키고 헌병경찰을 주둔시켰다.

< 비극의 한일합방 >

이등박문(이토오 히로부미)이 일본군을 출동시킨 가운데 을사오적인 이지용, 이근택, 이하용, 이완용, 권중현 등의 찬성하에 을사보호조약을 강요, 한일합방을 체결하였다.(국치일 1910년) 그러나 이미 일주일 전에 이완용과 데라우치 통감은 비밀리에 합방조약을 합의했었다.


4) 일본의 한국 지배

< 무단통치(1910년부터 1919년 3.1 만세 운동까지 >

일제는 최고 통치기구로써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고 입법, 사법, 행정권과 군통수권을 장악하였다. 또 헌병경찰제도로 조선민중의 숨통을 조였으며 철저히 무단탄압 하였다. 일제는 1908년 동양척식 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1912년에는 토지조사령, 임야조사령, 삼림령 등을 공포하여 조선의 토지를 수탈하였다. 그들은 대부분의 농민들을 소작농으로 전락시켜 일본경제를 위한 조달처와 시장으로 삼았다.

또 1912년에 제정된 조선민사령, 조선형사령 등은 식민지 통치법이라는 이유로 일본 헌법도 적용되지 않으며 조선인의 기본권 조차 무시한 잔혹한 악법이었다. 심지어 학교 교사까지도 제복, 제모, 일본도를 착용케하는 헌병경찰에 의한 무단정치와 무력적 탄압은 항일의병에 대한 무자비한 토벌로 이어져 만주, 연해주 등지로 독립 투쟁의 무대가 옮겨지게 되었다.

< 2단계 문화정치 - 황민화 정책(1919년부터 해방까지) >

1919년의 3.1 운동을 분수령으로 소위 문화정치를 내세워 한반도의 완전한 일본화를 추진하였다. 헌병통치가 경찰통치로 바뀌었을 뿐 폭압적 지배체제는 오히려 내적으로 심화되었으며 교활한 민족 분열책을 써 일제와 타협하거나 독립운동의 시기상조를 내세우는 민족개량주의자들이 늘어갔다. 일본은 많은 저항을 받았지만 이 저항의 과정에서 한국인들은 알게 모르게 차츰 일제에 오염되어갔다.

< 3단계 - 파쇼통치 >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은 일본경제 역시 대공황으로 몰고갔다. 뒤늦게 자본주의 대열에 선 일본은 그 돌파구를 제국주의적 팽창정책, 식민지정책의 강화, 중국대륙의 침략 등에서 찾으려했다. 그 결과 군국주의가 등장하고 조선을 중국침략의 전진기지 즉 대륙병참 기지로 이용하려 했다.

따라서 일제는 문화정치의 탈을 벗어버리고 한민족의 독립운동을 철저히 탄압, 말살하고 조선의 경제와 민중을 가혹하게 수탈했으며 아예 한민족의 정신을 말살하려고 극단적으로 광분하였다.

드디어 일본은 만주사변(1931년), 중일전쟁(1937년)을 거쳐 태평양 전쟁(1941년)까지 일으켰다. 태평양 전쟁으로 인한 아시아 각국의 피해는 인명피해만도 중국이 1천만명 이상, 베트남이 2백만명, 필리핀이 1백만명, 기타 수백만에 달하며 대전 중 조선과 중국에서 강제로 일본으로 징용되어 탄광이나 공장에서 일한 사람도 1백만명이 넘는다.

전쟁 범죄국인 일본 스스로도 3백만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으며 인류역사에 씻을 수 없는 죄악을 저질렀다.

< 조선 민족정신 말살정책 >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은 조선을 수탈하며 민족정신 말살정책을 했다. 조선을 일본에 강제흡수 하기위한 것이었다. 성씨개명을 강요하였으며 조선의 역사서를 모조리 빼앗아 없애고 조선의 역사책을 왜곡하여 편찬하였다.
 
[주:
그후 왜곡하여 편찬된 역사를 아직까지도 학교에서 교육하고 있다.
이는 해방 이후부터 친일 민족반역세력들이 집권하여 일본의 역사왜곡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 10년 기간만이 친일 민족반역세력이 집권하지 않은 민주정권 기간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는 거의 대부분 소실되었고 규원사화, 한단고기 등이 기적적으로 보전되었다.
이 사서들을 친일 민족반역세력들이 장악한 국내 사학계에서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단군조선때 만큼은 아니지만 조선의 백성들은 "홍익인간 이화세계" 라는 정신을 알았고 한국, 배달국, 단군조선의 역사를 알고 있었으며 선조들의 깨달음을 부분적이나마 알고 있었던 것이다.

< 3.1 운동과 애국선열들 >

일본인들이 불가사의 한 것중의 하나라고 하는 것이 3.1운동이다. 3.1운동은 누구의 명령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순수한 국민(학생, 노동자, 농민)들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일어났다. 더 놀라웠던 것은 그때 수 많은 사람들이 일본 형사 밑에 조선인 첩자들이 많이 있었지만 한명도 고발한 사람이 없었다. 일본 형사들이 주는 대가를 받아 살면서도 크고 순수한 대의 앞에서는 모두 고개를 숙였던 것이다.

또 당시에는 인쇄기도 거의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순식간에 그 수많은 태극기를 그렸는지 전국에 태극기가 휘날리고 그 함성이 전국에 메아리쳤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은 한번 더 놀랐으며 그것은 지금도 풀기 힘든 불가사의 중의 하나이다. 그 규모와 발생과정을 두고 세계역사상 기적과 같은 일이라고 한다.

이때 집회횟수는 3달동안 1542회, 연인원 202만 여명이 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당시 조선의 국내외 조선인 수가 1450만명 정도였으니 사지가 멀쩡한 어른들은 거의 다 참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위현장에서는 7509명이 일본헌병의 총칼에 무참히 살해당했다. 부상자는 1만 896명이고, 4만 6948명이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과 처벌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3.1운동은 세계를 놀라게 했고 3.1 운동은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독립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런 움직임은 베트남, 필리핀, 이집트등 세계각국으로 번저나갔다. 일제의 세뇌와는 달리 우리나라 사람들은 원래부터 단합을 못하는 민족이 아니었다. 3.1운동때만 해도 단합하는 정신,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는 정신이 있었다.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대의를 위해 전 국민이 한번 일어난 것이다. 그때만 해도 우리의 민족의식은 굉장히 살아있었다. 그래서 그때는 동.서.남.북 할것 없이 전국민이 태극기를 들고 일어났다. 이처럼 우리 한민족은 대의명분이 있으면 일어나는 민족인 것이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난 3.1 운동과 대가를 바라지 않고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선열들 덕분에 결국은 해방될 수 있는 하나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자유와 독립을 찾고자 하는 의지가 없으면 어떤 나라든 독립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조선사람들에게는 정말로 그런 의지가 있다." 이런 생각을 갖게 만든 것이다.



Ⅵ. 현대


1. 현대

1) 감격의 8.15 광복-분단의 시작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어 전의를 상실한 일본은 마침내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그후 미.소 양군이 남과 북으로 진주해 들어와 각각 군정을 선포했다. 타의에 의한 남북 분단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북쪽에는 소련 공산당의 세력을 업고 김일성이 등장했으며 남쪽에는 미국의 힘을 배경으로 이승만 정권이 들어섰다. 이제는 사상적으로 서로 적이 되어야 했다.

한편 남한에서는 친일 민족반역자들에 대한 처벌과 일제 청산작업이 좌절되면서 민족정기를 바로 잡을 기회를 놓쳤다. 그로부터 한국의 정치는 가야할 길을 잃고 수많은 비민주적, 비자주적 시행착오를 격게 된다.


2) 일제 잔재 청산의 실패

미국의 점령군 사령관 하지중장은 처음에 한국사정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미군정청을 설치하여 3년간(1945-1948) 군정에 들어갔다. 이 기간 동안 일본에 협력했던 친일파들이 미군정에 의해 다시 중용되었고 재빨리 친미파로 돌변했다. 그리고 힘을 축적한 친일파들은 반민특위(반민족행위 특별 조사위원회)의 일제청산작업을 좌절시키고 계속해서 기득권을 누리게 되었다.

"반민족 행위처벌법"이 제정되었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처음부터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는 "국회가 국론을 분열시키고 반공에 앞장 선 애국자를 탄압한다"며 반민특위의 활동을 공공연히 비판했다. 결국 이 대통령은 경찰을 동원하여 반민특위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그후 반민특위에서 활동하던 국회의원들은 "빨갱이의 앞잡이"로 몰려(국회 프락치 사건) 체포, 구속되었다.


3) 동족상잔의 비극 - 6.25 전쟁

< 전개 >

"연합군으로서의 참전"이라는 공적도 없이 광복을 맞았기 때문에 북쪽에는 소련군이 진주했고 남쪽에는 미군이 들어와서 남과 북으로 또다시 갈라지게 되었다. 그렇게 광복의 기쁨도 잠시 뿐 이번에는 사상으로 민족의 허리가 잘렸다. 사상의 차이는 급기야 민족최대의 비극인 6.25 전쟁이라는 참사를 부르게 되었다.(1950년)

전쟁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상태에서 6.25를 맞은 대한민국은 한때 낙동강 이남만 남겨놓고 전국이 인민군의 수중에 떨어질 정도로 위기를 맞았었다. 그후 유엔군의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하여 국군은 한때 압록강까지 진군하기도 했다. 그러나 예상치 않았던 26만 중공군의 참전으로 다시 후퇴를 거듭, 서울이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가기도 했다. 3년간의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27일 미군장성과 북한대표의 휴전협정 조인으로 막을 내렸다.

< 6.25의 결과 >

이 전쟁을 통해서 남한에서는 백만명, 북한에서는 3백만명 이상으로 도합 4백만명이 죽거나 다쳤다. 그리고 사상을 이유로 남북한에서 50만에 달하는 우리 국민들이 학살 당해야 했다. 또한 남북한은 거의 모든 산업시설이 파괴되었고 전국토는 폐허로 변했고 헤아릴 수 없는 고아와 이산가족이 발생해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은 또다시 치유되기 힘든 피멍이 들었다.

반면 한민족의 그러한 희생은 일본에게는 전쟁특수로 이어져 일본부흥에 결정적으로 기여하게 되었다. 향후 일본은 경제대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한편 미국은 국내경기 침체를 회복하고 소련과 더불어 세계의 강대국으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없었다면 일본의 부흥은 10년 이상 늦어지고 미국의 경기침체는 회복되지 못했을 것이며 독일의 이른바 "라인강의 기적"도 늦어졌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4) 변혁의 시대

< 이승만 대통령과 제 1 공화국 >

이승만 대통령은 6.25 전쟁 발발이후 절대 서울을 사수할 터이니 굳이 피난을 떠날 필요는 없다고 공언하였다. 그리고는 인민군의 남하를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한강철교를 폭격하여 그 말을 믿고 남아있던 시민들이 피난도 갈 수 없게 다리를 끊어놓고는 후퇴해 버렸다. 그때 민초들의 마음속에서 정부와 정치가에 대한 믿음이 또한번 상처를 입은 것이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의 실정이 계속 되더니 4.19 혁명이 일어나면서 초대 대통령의 하야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후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망명지인 하와이에서 쓸쓸하게 병사하였다.

< 박정희 대통령과 제 3 공화국 >

4.19 학생, 시민의거로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 정권이 들어섰지만 서로 계속해서 분열과 갈등만 거듭하다가 민주정치를 시행하고 민심을 수습할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결국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한다"는 명분으로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고 박정희 대통령이 역사에 등장하게 되었다. 5.16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은 그 자신의 표현대로 "불행한 군인"이었으며 군사정치를 연 장본인이다.

해방 이후부터 60년대 초까지 우리나라는 미국의 경제원조를 받는 나라였다. 일제시대의 참상을 격은 지 얼마 되지않아 맞은 6.25 전쟁으로 남과 북은 그야말로 전국이 폐허가 되었다.

그후 70년대까지는 경제자립이 최우선 정책이었다. 그래서 정부 주도로 추진된 5차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당초 목표를 달성함으로써 우리나라의 경제는 획기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것을 외국에서는 "한강의 기적"이라 불렀다.

한편 외자도입에 의한 성장위주의 개발정책은 정경유착, 중소기업의 몰락과 재벌의 비대, 저임금 노동 등 많은 문제점들을 노출하기 시작했다. 그후 박정희 대통령은 통일 문제를 이용하여 군사 독재권력을 강화하다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되었다.



민족이 중요한 이유

고려시대 이래로 1천여 년간 수난의 시대를 거치면서 사람들은 각자 자기를 보호하는데 급급해졌고 자기와 자기 가족만 잘 먹고 잘 가르치고 잘 사는 것만이 유일한 관심사가 되어버렸다.

"민족"이라는 것이 가슴에 들어오지 않으면 보통사람들의 의식은 자기와 자기 가족만 생각하는 작은 이기주의에서 떠날 수 가 없다. 의식이 점프할 수 있는 가장 큰 방법은 민족을 가슴에 품는 것이다. 그래야만 사람의 의식이 전체적인 차원으로 올라가게 되고 그때 자기 자신의 문제가 아무것도 아니게 보이는 것이다.

민족과 인류라는 의식이 없기 때문에 모두들 개인의 조그마한 문제에 매달려서 울고 불고 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민족이라는 것이 가슴에 들어오면 의식이 커지면서 개인의 조그마한 문제가 작게 보이는 것이다.

또한 온 국민들이 민족정신을 알게 되면 자연히 나라에 관심을 갖게 되며 정권이 나라와 민족을 위한 정책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도 알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국민여론의 힘이 강해져서 정부가 국민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게 된다. 정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온 국민의 결집된 여론인 것이다. 국민 모두가 민족정신으로 깨어나면 나라를 바로 잡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민족주의는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는 대로 극단적으로 흐르기 쉽다. 과격파 민족주의자들은 성전을 수행한다면서 인간폭탄이되어 사람이 많은 곳에 뛰어들어 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있으며 극단적인 민족주의로 인해 나라와 나라가 대립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우리만 잘 살자는 극단적인 민족주의가 아니라 온 인류가 함께 조화롭게 잘 살자는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정신으로 건국된 유일무이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우리의 평화애호 정신은 이유없이 남을 침략하여 괴롭힌 적이 없는 체질적으로 "어질고 순한" 사람들이다.

우리 민족의 기본정신은 바로 인류평화의  정신이기 때문에 그 정신에 정말로 충실하다면 한민족만은 아무리 민족정신을 강조하여도 극단적 민족주의로 흐를 염려가 전혀 없다.



맺으며

우리 나라 국민들중 대다수가 민족의 역사와 정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무척 안타깝고 통탄스러운 일입니다. 시국이 중대한 때인 만큼 부족한 글이지만 많은 분들이 이 글을 접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단기 4342년(서기 2009년)~

행세성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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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오포노포노 - 불행한 기억과 마음, 감정, 고정관념 등을 정화하여 치유하고 문제를 해결하여 풍요와 자유를 누리는 방법



본문에서 글쓴이가 말하는 것이 100% 맞는다고 단정하지 않으며 만에 하나 틀린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호오포노포노

호오포노포노를 하는 방법은 쉽고 간단합니다. 마음속으로 조용히 다음과 같이 말해보세요.



'미안합니다   용서하세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지속적으로 꾸준히 수시로 해야합니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생각보다 큰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미안합니다 용서하세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모든 것을 덮고 무조건 용서하고 사랑합시다' 라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불행한 기억과 마음, 감정, 고정관념 등을 정화하고 치유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미안합니다 용서하세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이 말을 하면 불행한 기억과 마음, 감정, 고정관념 등을 정화하고 치유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마음과 감정이 정화되고 치유되어 마음이 편안해지고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감정에서 벗어나면 문제의 원인을 볼 수 있게 되고 원인을 제거하여 문제를 해결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호오포노포노는 불행한 기억과 마음, 감정, 고정관념 등을 정화, 치유하고 문제의 원인을 제거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불행한 기억과 마음, 감정, 고정관념 등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문제의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서 마음속으로 자기 자신에게 조용히 '미안합니다 용서하세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미안합니다   용서하세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나사또

'미안합니다 용서하세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내키지 않는다면


'나는 나를 사랑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도 좋습니다.


호오포노포노와 함께 나사또를 추천합니다. 나사또는 마음 속으로 또는 소리를 내서 '나는 나를 사랑합니다 또 나는 나를 사랑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사또를 하면 호오포노포노를 하는 것과 거의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으며 수시로 끊임없이 해야하는 것 등 방법은 같습니다.

(나사또는 호오포노포노와 마찬가지로 글쓴이가 창안한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내면의 소리와 느낌 그리고 떠오르는 영감

호오포노포노와 나사또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중 하나는 내면과의 연결입니다. '미안합니다 용서하세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또는 '나는 나를 사랑합니다' 라고 말할 때는 내면과의 연결이 다른 때보다 더 잘 이루어지는데 이때 집중하고 있으면 '내면의 소리와 느낌 그리고 떠오르는 영감'을 얻기가 훨씬 더 쉬워집니다.

호오포노포노와 나사또를 할 때 '내면의 소리와 느낌 그리고 떠오르는 영감'에 집중하기 바랍니다. 호오포노포노와 나사또를 할 때 내면의 소리와 느낌, 영감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영감은 어느 순간 번뜩이며 뇌리를 스치면서 떠오르는 생각, 영상 등으로 찾아오는데 내면의 소리와 느낌과 동시에 또는 연결되어 오기도 합니다. 또한 '양심의 소리'도 내면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렇지만 내면의 소리와 느낌, 영감을 얻는 것에 집착하지는 않아야 합니다. 호오포노포노와 나사또를 할 때 '내면의 소리와 느낌 그리고 떠오르는 영감'을 놓치지 않도록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집착하게 되면 오히려 내면의 소리와 느낌, 영감을 얻을 수 없게 됩니다.

또한 자신의 이기심에서 나온 것을 내면의 소리와 느낌 또는 영감으로 오해하게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으니 주의가 필요합니다.

내면의 소리와 느낌, 영감을 얻는 것은 처음에는 쉽지 않고 분명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내면의 소리와 느낌 그리고 떠오르는 영감'에 집중하면서 호오포노포노와 나사또를 꾸준히 하면 어느 순간부터 점점 쉬워지고 분명해지게 될 것입니다.

내면의 소리를 듣고 그것을 용감하게 실천할 때 우리는 어떤 즐거움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진정한 '창조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가슴(내면)에서 시키는 것을 실천할 때 의식이 더욱 성장하며 자신감이 더 커지고 마음이 더 크고 강해집니다. 단지 그것이 내면이 아닌 자신의 이기심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으니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기 4342년(서기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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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논의, 논쟁 그리고 느린 민주주의의 가치
지금까지 5개의 당적을 가졌습니다. <통합진보당> - 경선부정 사태, 진성당원제(기간당원제)
유시민입니다. 당의 혁신을 원하는 당원이 생각해 볼 문제들 <통합진보당> - 경선부정 사태, 대중적 진보정당, 혁신


[보도자료] 천호선 대표 “철도파업 자초, 정말 미래 없는 것은 오히려 朴” <정의당> - 철도민영화
종묘공원의 박카스 아줌마들 이야기 - 그런 쓸쓸한 모습, 보편적 복지의 필요성
다시 뜨거워진 촛불 열기 "국정원 대선 개입 박근혜 책임져야"
대화록의 진실5 “북의 체제붕괴는 우리에게 좋은 일인가?” - 남북통일
대화록의 진실7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를 살려야 한다” - 남북관계, 남북평화, 남북통일
대화록의 진실4 “친미(親美)국가도 자주(自主)를 할 수 있는가?” - 2007 남북정상회담, 친미와 친미주의, 반미와 반미주의
[논평] 이정미 대변인, 국정원의 선거개입과 여론조작 의혹, 신속하고 철저한 수사를 촉구한다 <진보정의당> - 2012 대선
세종시는 충청도만의 문제가 아닌 모든 국민을 위한 것 - 국민참여당, 행정중심복합도시, 국가균형발전, 수도권과밀화해소
세종시 필사적으로 막는 이유 - 수도권 부동산 폭락(버블붕괴)
■독일 거주 한인학자의 4대강사업 비판■ - 대운하, 환경파괴, 생태계파괴, 홍수와 지하수고갈, 수질악화
4대강 사업의 5대 허구를 밝힌다! - 홍수, 물부족, 수질, 일자리, 죽은강
추모사업회, 민주통합시민행동, 시민주권모임에 대하여(야권대연합-후보단일화, 범국민정치참여)
MB의 미디어법 바로 알기
다문화 선동의 본질 - 외국인 노동자
우리 소통위!! 충격 애국동지 여러분 이거 봐주세요
장자연 리스트를 살포한 네티즌들을 잡아들이겠단다.
정말 명문입니다 (언소주, 조중동절독/광고주불매/삼성불매)
대한민국<100년 국부> 일본에 넘기려하네! (핵융합기술 인공태양 핵융합로 ITER 토카막 KSTAR)
국가생명윤리위 승인은 ‘편파적’ (황우석의 줄기세포)
경찰의 불법적 단속과 폭력진압에 대한 대응책(행정소송)
전라도 혐오증이 문제다 - 지역감정 문제의 핵심은 보수(?)정권의 경상도와 전라도 등의 지역차별
깨달음의 민족 - 한민족의 역사와 정신 (한국, 배달국, 단군조선-고조선 등)




나는 나를 사랑합니다

나는 나라와 민족을 사랑합니다

나는 인류를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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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행세성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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